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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
초등학교 5학년 어머니가 우울한 얼굴로 찾아왔다. 아이가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무슨 시험이냐고 물었다. 학원 상급반 편입 시험이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슨 일을 하길 바라는지 물었다. 아이는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나 전문직 종사자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가 의사니, 집안 어른들은 의대 가기를 원한다고 했다. 순발력이 다른 아이들보다 좀 떨어져 배우는 속도가 느리다고 했다. 시간을 주고 여러 번 반복하면 이해는 다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평범한 아인데 부모가 자꾸 욕심을 내서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나는 이야기를 듣다가 은근히 화가 났다. 대기만성형 아이니까 레벨테스트 같은 것은 받지 말라고 했다. 자칫하면 잠재 능력과 창의성을 말살할 수 있다고 했다. 엄마의 말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글쓰기를 좋아한다.' 샤를 보들레르가 말한 예술가의 천재성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는 "예술가의 천재성이란 의지로 되찾은 유년기, 이제는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어른의 육체적 능력을 갖춘 유년기, 그리고 무의지적으로 축적된 경험의 총합에 질서를 부여하는 분석적인 능력을 갖춘 유년기"라고 했다. '아이의 눈과 순수함을 가진 어른'이 예술가라는 말이다. '아이의 호기심'을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든 창의력을 발휘하고 성공할 수 있다.
'느리지만 이해는 한다.' 아이는 훌륭한 학자가 될 자질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어설픈 속도는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기 쉽다. 무엇을 빨리, 많이, 정확하게 암기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하던 시대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압축적인 경제 성장 시기에는 남보다 암기를 잘하는 사람이 경쟁력이 있었다. 그런 사람은 시험과목이 정해져 있는 사법·행정 고시, 의학 공부 등에서 단연 유리했다. 그러나 잘 외우는 사람이 창의성을 요구하는 일에서는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산업사회에서는 '바로 이해하고 별 질문 없이 지시받은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 안정된 삶을 향유할 수 있었다. 호기심이 많아 질문이 많고, 섬세한 감성과 상상력으로 생각이 깊은 사람은 비효율적 인간으로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 AI가 많은 것을 대신해 주는 시대에는 느려도 창의적인 사람이 경쟁력을 가진다. 질문거리가 없는 사람은 새롭고 기발한 것을 창조하기 어렵다.
'평범한 아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런 아이에게 자꾸 무엇을 기대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두고는 부모의 각성을 촉구했다. 절대다수의 사람이 평범하다. "성공한 보통 사람은 천재가 아니다. 평범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평범함을 비범하게 발전시킨 사람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이다. 평범한 사람이 꾸준히 노력해서 실력을 쌓으면 정말 무섭다. 다지면서 축적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충분한 연습으로 실력을 쌓으면 필요한 순간에 질적 비약이 일어난다. 모차르트조차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의 첫 출세작으로 평가받는 스물한 살에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 9번'은 유년 시절부터 그때까지 이어진 혹독한 연습과 훈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항상 아들의 단점을 보완해 주며 '진전이 있는 훈련'에 유의했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 가야금 명창 황병기 같은 연주자도 연습의 대가였다. 그들은 연습 때마다 문제점을 파악하고 조금씩 나아지려고 노력했다. 느린 사람이 성공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피카소, 아인슈타인, 에디슨 등 수많은 천재가 유년기에는 학습 속도가 느렸다. 심지어 학습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평범과 비범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고 노력이 중요하다. 그 유명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이 기차간에서 단숨에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후에 백악관에서 그 연설문 초고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그가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짐작할 수 있다. 최종 원고가 기차간에서 완성됐을 뿐이다.
평범 속에 숨어있는 비범의 씨앗이 발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부모고 교사다. 다른 아이의 성공담이나 순발력을 부러워하지 말자. 내 아이의 가슴속에 묻혀있는 다양한 가능성의 씨앗을 찾아내 그것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사랑과 믿음으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기며 함께 걸어가는 교육을 생각해야 한다.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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