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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산 경관폭포. 절벽은 누만 년의 세월로 서 있고 폭포는 2019년에 만들었다. 높이 50m, 폭 10m 규모다. |
폭포가 거대한 암벽을 타고 내린다. 그 모습에 혹해 가던 길을 돌린다. 천변에 내려서서 마주 보고 선다. 폭포는 뛰어내리지 않는다. 소리도 없이 흐른다. 천변의 휑한 산책로를 따라 가장 가까운 물가로 간다. 주름 하나 없는 물은 명경 같고 흰 강돌은 눈 내린 듯하다. 몇몇 차들은 햇빛 속에 잠들어 있고 사람들은 온데간데없다. 맑은 천과 거대한 암벽과 부드러운 폭포가 통째 내 것이다.
낙동강 향하는 '미천' 남후면 광음리서 멋진 풍광 만들어
유원지 초입 2019년 조성한 높이 50m 거대한 인공폭포
일제때 뚫은 암산굴, 5번 국도 옮기기 전 안동 관문 역할
만장암 절벽에 천연기념물 구리측백나무 300여그루 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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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산유원지는 놀이 공원이 많지 않던 시절 안동 사람들에게 최고의 공원 중 하나였다. 겨울이면 유원지 앞 천에서 얼음 축제가 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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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산굴을 통과해 옛날 대구와 안동을 잇던 국도가 지나간다. 5번 국도가 확장되어 우회하기 전, 암산굴은 안동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
◆암산유원지
물길은 미천(眉川)이다. 천이 굽이치는 모양이 눈썹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의성에서 시작된 미천은 안동 일직면과 남후면을 통과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남후면의 광음리에서 미천은 바위산인 암산을 만나 굽으며 절경을 만드는데, 그곳에 암산유원지가 있다. 폭포는 암산유원지로 가는 초입에 있다. 남안동에서 5번 국도를 타고 안동 시내로 향하는 길에서 훅 마주친다. 절벽은 누만 년의 세월로 서 있고 폭포는 2019년에 만들었다. 높이 50m, 폭 10m 규모다.
암산유원지는 바위벽과 물과 수목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요하고 아늑하다. 수목의 그림자 넉넉해, 낮 빛이 초록이다. 유원지 식당의 평상에 서너 사람, 말소리도 조곤조곤하다. 온몸이 젖은 아이들도 지금은 잠시 쉬는 시간이다. 놀이 공원이 많지 않던 시절, 암산유원지는 안동 사람들에게 최고의 공원 중 하나였다. 지금도 여름 휴양지로 이름나 있지만 많이 고요해져 물가에 나란히 서 있는 오리배만이 유원지 분위기를 풍긴다. 오리배 선착장에 서면 우뚝 직립한 암산을 마주 본다. 거의 수직으로 솟은 절벽은 만장암(晩將巖)이다. 툭 떨어져 내린 절벽 아래에 뻥 뚫린 굴이 보인다. 일제 때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뚫은 굴이라 한다. 그 굴을 통과해 옛날 대구와 안동을 잇던 국도가 지나간다. 5번 국도가 확장되어 우회하기 전, 암산굴은 안동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암산굴이 뚫린 벼랑은 도로의 펜스를 넘어 미천 속으로 잠기면서 그 앞에 아주 깊은 소(沼)를 만든다. 천은 여기서 잠시 호수가 되어 광영담(光影潭) 또는 광영호라 불린다. 그 물 밑의 암반은 수성암 또는 청석이라 하여 예부터 벼루를 만드는 원석으로 이름 높았다. 오랜 시간 동안 물속에 잠겨 육중한 바위산이 누르는 압력을 온몸으로 받아낸 암석은 치밀하고 단단하며 먹을 갈아 종일 두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최고의 벼룻돌이었다 한다. 광영담은 겨울이면 얼음 축제가 열리는 스케이트장이 된다. 안동에서 가장 먼저 얼고, 전국 규모의 빙상경기가 열린 적이 있을 만큼 빙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여기서 배기태 선수가 발목을 심하게 다친 적이 있다. 그래서 빙질이 지나치게 좋은 것이 흠이라는 명성도 있다.
만장암 절벽에는 정오가 지나야 햇빛이 든다. 볕이 들면, 유원지의 모든 것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미천에는 윤슬이 돋고, 수목의 푸른 이파리들은 반짝인다. 절벽을 뒤덮은 작은 나무들이 새끼 새처럼 목을 뻗는다. 온몸이 젖은 아이들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암산 유원지는 부드럽고 고요한 재잘거림으로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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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서원. 대산은 노년에 이 터를 발견하고 57세 때 3칸의 띠집을 짓고 고산정사라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후학들이 정사 뒤에 서원을 지었다. |
◆구리측백나무 숲과 고산서원
만장암 절벽의 작은 나무들은 구리측백나무다. 약 3백 그루의 구리측백나무가 바늘이끼, 부처손, 은빛 고사리들과 함께 자생하고 있다. 수령은 백년에서 2백년 정도로 추정되지만 그 크기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작다. 거의 직립한 절벽에 매달려 정오가 지나야 찾아드는 햇빛을 받으며 살아야 했기에 그런듯하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그마한 몸으로 살아도 나무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린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보기 드문 측백나무 자생지여서 천연기념물 제252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암산굴 앞에 구리측백나무 숲에 대한 안내판이 있지만 그곳에서 올려다보는 것보다 암산유원지에서 바라보는 것이 전체를 보기에 훨씬 좋다.
암산유원지 뒤쪽 언덕 위에는 멋진 소나무 숲을 앞세운 서원 하나가 자리한다. 대산 이상정을 기려 세운 고산서원이다. 옛날 이 일대의 마을을 고암 또는 암산이라 불렀는데 대산은 그 둘을 합쳐 고산이라 했다고 한다. 대산의 집이 안동 일직면에 있다. 그는 노년에 이 터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57세 때 강변에 3칸의 띠집을 짓고 고산정사라 했다.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후학들이 정사 뒤에 서원을 지었다. 대산은 퇴계의 학맥을 이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오직 학문과 교육에만 힘썼다 한다. 그가 남긴 저술은 52권 27책에 모두 2천157판에 달한다.
고산서원에 서면 반짝이는 수목의 우듬지에 가려진 유원지의 조각들과 미천의 푸름과 암산의 고고한 절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대산은 자신의 집에서 이곳을 거쳐 우릉으로 이어지는 풍광을 고산잡영(高山雜詠)으로 노래했다. 7구비의 노래 중 4곡이 고산정사다. '물 맑고 산 깊은 곳에 한 마을이 있는데/ 텅 빈 서재에 온종일 사립문을 닫고 사네./ 물가에서 조는 새며 계단에서 웃는 꽃/ 향 한 자루 피워 놓고 말없이 앉아 있네.' 시가 그림이다. 말없이 앉아 있는 그와 향 한 자루가 피워 올리는 연기를 사이에 두고 앉은 듯하다. 애초에 가던 길은 무릉이었다. 잊지 못하는 무릉. 무릉은 지금 공사 중이다. 파헤쳐진 땅에 작은 모래산이 고요히 서 있었다. 다음이라는 것은 헛되고도 벅찬 것. 지금이라는 것은 벅차고도 헛된 것. 마주 선 바위산은 청신한 숨을 쉬고, 물길과 나란한 옛길엔 바람만 달린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
대구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남안동 IC로 나간다. 5번 국도를 타고 안동시내 방향으로 가다보면 폭포가 보인다. 암산유원지 방향 우측으로 나간 후 암산유원지 쪽으로 우회전해 광음교를 건너면 폭포를 마주보는 천변에 작은 산책길이 있다. 암산길을 따라 가다 첫 번째 다리를 건너가면 암산유원지가 나오고, 암산길을 따라 계속 가면 암산굴을 통과한다. 암산유원지의 뒤쪽 언덕에 고산서원이 위치한다. 유원지는 개인 소유이고 출입 통제 바가 설치되어 있지만 서원을 둘러보는 데는 문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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