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망치지 않으면서
네 아이도 다쳐서는 안되는
그 지점에 부모의 훈육있어
배려 바라고 배려하는 의지
교집합이 부모 자리 아닐까
![]() |
김살로메 (소설가) |
여러 학부모 갑질 사건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이 모든 게 육아의 중요성으로 연결된다. 마침 유튜브 추천 영상에도 공감 가는 육아 관련 주제가 뜬다. 미국 거주 중인 한·미 커플 부부가 두 돌을 갓 넘긴 아기의 식탁 예절을 가르치고 있다. 식사를 마친 아기가 의자에서 내려오려고 떼를 쓰자, 부모는 "안 돼, 엄마 아빠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라고 부드러운 듯 단호하게 훈육한다.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눈치챈 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멈추고, 얌전히 아기용 식탁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서구 사회라지만, 필요하다면 너무 어리다 싶어도 훈육에 돌입하는 게 그들의 원칙이란다. 훈육에 지나치게 이른 시기란 없도다!
서구와 우리의 육아 방식이 다른 것과 함께, 요즘의 육아법 또한 한두 세대 앞선 방식과는 적잖이 다르다. 아이들의 마음을 무시하던 방식에서 마음 읽어주기, 나아가 마음 다치게 하지 않기 등으로 진전해왔다. 한마디로 예전에는 부모 중심 시선을 중시했다면 현재는 아동 중심 육아가 대세이다. 비민주적이고 비교육적인 방식에서 탈피해 아동 인권이 그 어느 때보다 신장되었기에 환영할 만한 변화이다.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어느 순간부터 일부의 '극단적인' 아동 중심 육아가 마치 정당한 육아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기 시작했다.
다산의 시대에는 허용되던 것들이 '금쪽이' 자녀 시대인 요즘에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이 되었다. 좋은 예가 체벌 금지 같은 조항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체벌은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들이 권력을 행사해도 좋고, 급기야는 그들이 왕이 되는 시간이 왔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에 상응하는 덕성이 발현될 때 건전한 권리가 될 것인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생긴다.
약한 아이나 특별한 아이가 배려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해도, 용인되고 이해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가 거부하고 싫어하더라도 훈육이 필요할 때는 단호해져야 한다. 아주 어린 아기도 예외 없이 훈육의 대상이 되는데, 아기보다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아동 시기에 그것을 유예할 이유는 없다. 마냥 응석받이로 키우고 보호하는 것이 아이를 위하는 방식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부모의 권위로서 아이의 주체성을 일깨우고 올바른 사회적 자아를 정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회인의 기초가 되는 평범한 아이로 키우는 것조차 쉽지 않은 세상이다. 제아무리 육아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이는 자라주지 않는다. 힘들고 버겁더라도 훈육의 마당을 내딛는 일, 그것이 부모의 길이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다. 부모의 훈육 태도는 시간이 걸려도 아이들에게 읽히고 전수된다.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나친 내 아이 위주의 시선'에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점. 내 결핍을 상대에게 투사하다 보니 선을 넘는 경우가 생긴다. 내 아이는 배려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아이를 망치고 부모의 시야를 막는다. 무조건적 수용이나 동의가 공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잘못된 행동에 대한 한계를 선명하고 지속적으로 깨치는 일이야말로 공감에 닿는 빠른 방식일 수도 있다. 누구나 사랑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도 상처받을 이유는 없다. 내 아이를 망치지 않으면서 네 아이도 다쳐서는 안 되는 그 지점에 부모의 훈육이 있다. 배려를 바라는 맘 못지않게 배려하려는 의지, 그 둘의 교집합이 부모의 자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김살로메 (소설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