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로 홍콩과 거래 튼 三星物産株式會社(삼성물산주식회사) , 1년반 만에 업계 7위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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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재단 제공> |
1948년 11월. 서울은 어수선했다.
이승만 정부가 출범했으나 서울 시내에서는 수백 수천 명의 좌익과 우익이 돌을 집어 던지며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종로2가 YMCA 빌딩 근처에 있는 영보빌딩의 2층에 삼성물산공사라는 간판이 걸렸다.
공사라는 이름을 내건 것은 장차 주거래선이 될 홍콩의 화교상인들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화상들은 기업의 이름 끝에 항상 공사를 붙이기 때문이었다.
삼성물산공사는 주식회사 체제였다. 주식회사이니 당연히 출자자들이 있다.
1948년 11월 홍콩 대상 무역업 시작
조홍제 오징어 3만관 싣고 부산출발
현지 도매상 가격담합에 판매 포기
그대신 담보 거래로 면사 싣고 귀국
후속 거래 지속되며 수입품 다양화
그중 설탕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
1950년3월 결산 1억2천만원 순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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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부두 〈일본인 마루모블로그 제공〉 |
'이병철이 75%를 출자했고 전무 조홍제(후일 효성그룹 창업주), 김생기(후일 영진약품 창업주), 이오석, 문철호, 김일옥씨 등이 나머지 25%를 댔다'라는 것이 삼성 측의 주장이다. 효성 측의 주장은 조홍제가 70%, 이병철이 30%이며 나머지는 미미하다고 한다.
조홍제는 계수에 관해서는 달인이었다. 말하자면 암산이 경리과장보다 더 빨랐다고 하는데 계산을 할 때 손가락에 성냥개비를 끼워서 계산하는 이른바 성냥개비 주판 셈의 명수였다고 한다. 손가락에 성냥개비를 끼우는 것은 그저 하나의 방식일 뿐 그 자체로 계산이 되는 것은 아니다. 머릿속에 주판을 그리고 머릿속에 있는 주판으로 계산을 한 것이다. 훗날 조홍제는 효성그룹을 창업하게 되는데 효성의 직원들은 조홍제 회장에게 보고할 때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숫자에 대한 기억이 뛰어나고 계산이 빨라 단번에 문제점을 집어냈기 때문이다.
이병철의 경우도 그러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이병철도 암산의 달인이었다. 세 자릿수 곱셈 정도는 머릿속에서 번개보다 더 빠르게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숫자를 외우는 데도 천재적이어서 계열사 사장들이 계산을 잘 못해 오면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삼성물산의 초대사장은 이병철, 전무는 조홍제, 상무는 김생기였다.
이병철이 독자적으로 자본을 전부 대지 않고 합자를 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경영방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회사 운영 기본방침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일정한 자본금의 규모를 정하지 않고 사원이면 누구나 응분의 투자를 하고, 이익의 배당을 투자액에 비례해서 공평하게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한다.
둘째, 사장이거나 평사원이거나 간에 공존공영의 정신으로 일에 몰두하게 해 능력에 대한 대우와 신상필벌의 기풍을 마련한다.
셋째, 사원의 생활안정을 고무하기 위하여 운영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우대하여 가족적 분위기가 항상 유지되도록 한다.
당시 이병철이 사원들에게 25%만큼의 출자를 하도록 한 것은 출자자들에게 회사 이익이 곧 자기 이익이 되는 것이므로 서로 분발해서 회사를 키울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사원이면 누구나 응분의 투자를 하고 이익배당을 받게 되며 지분이 있으므로 모두 내 회사라는 기분으로 열심히 일하게끔 만드는 분위기로 나갔던 것이다. 이병철이 사원 대우를 잘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광복 직후 대구에서 있었던 대구 10월 폭동사건을 본 후부터라고 한다.
그때 이병철은 기업가는 돈을 벌면 사원들에게 배분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속에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야 대구의 10월 폭동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홍제, 홍콩무역을 전담하다
삼성물산공사가 시작한 것은 무역업이었다. 거래 대상국은 홍콩이었다.
당시의 무역은 주로 홍콩의 화교 상인들이 배에 설탕, 면사, 재봉틀, 의약품, 철판, 비료 등을 싣고 와서 부산과 인천 등지에서 한국의 마른 오징어와 한천, 면실박(목화에서 기름을 짜낸 찌꺼기) 등과 바꿔 가는 것이었다. 즉 물물교환 형태의 구상무역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무역상들은 홍콩에서 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들과 물물교환 방식의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우리나라의 무역상들도 수출품을 무역선에 싣고 홍콩 등지의 무역상들을 직접 찾아가는 식으로 무역의 형태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병철도 가만히 앉아서 홍콩 무역선을 기다리기보다는 직접 바이어를 찾아 나가기로 하였다.
1949년 11월 조홍제는 부산에서 홍콩으로 가는 배를 탔다. 8일간의 긴 항해였다. 조홍제는 화물여객선을 타고 홍콩에 도착했다.
아직 비행기 왕래가 없을 때였으므로 당시 모든 사업가는 거의 배를 타고 홍콩을 왕래했다. 황폐한 조국, 비누, 치약, 수건 한 장 변변하게 만들지 못하는 나라에서 사업 일선에 나선 것이다.
조홍제는 홍콩의 실정도 알아보고 거래처 사람들도 만나 그곳의 상황을 보고 싶었다.
조홍제가 탄 배의 화물칸에는 홍콩에 내다 팔기 위한 오징어 3만관(12t)이 실려 있었다. 조홍제는 영어나 독일어, 일어는 능통했지만 중국어는 조금 짧았으므로 정 급하면 필담으로라도 대화를 할 생각이었다. 통역이 필요했지만 한국에서부터 통역을 데리고 나간다는 것은 경비문제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구룡반도 침사추이에 있는 찬넬양행을 찾아갔다.
찬넬양행은 중국인이 경영하던 일종의 소규모 무역상사로 이미 우리나라의 천우사와 거래를 하고 있었다. 천우사는 전택보가 한국 최초로 개설한 무역상사이다. 당시 찬넬양행은 전택보 외에도 김기탁(현 삼화제지 회장)을 비롯해 이미 한국과 상당한 거래선을 가지고 있었다.
홍콩에는 오래전부터 한국에서 진출한 교포 3~4인이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임창복이 가장 왕성하게 사업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임창복도 조홍제를 반갑게 대해주면서 성실하게 홍콩의 실정을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임창복과의 새로운 거래가 시작되었다. 조홍제도 임창복의 성실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 그와 거래하기로 작정했다. 훗날 알아보니 임창복은 중국인의 상술 못지않았다. 한국인의 상술이 중국인의 상술에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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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거래의 성공
조홍제가 홍콩에 갔을 때도 역시 무역은 물물교환이었다. 달러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조홍제는 자신이 가지고 간 3만관(약12t)의 오징어를 홍콩 측에 팔고 그 대금으로 양복지 원사 등을 구입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막상 3만관의 오징어를 매각하려고 하니 홍콩의 수입상과 도매상들이 담합을 하여 오징어값을 형편없이 후려치는 바람에 도저히 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너무 헐값이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조홍제는 홍콩거주 한국인 무역상 임창복에게 "3만관의 오징어를 담보로 면사를 D/P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다. D/P무역이란 외상무역을 말한다.
임창복은 3만관의 오징어에 해당하는 면사 50곤을 내주었다. 또 찬넬양행에서도 그 오징어를 담보로 역시 면사 50곤을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최초로 대홍콩 외상무역이 이뤄진다.
당시 조홍제가 오징어 대신 면사를 요청한 이유는 면사를 한국에 가져오기만 하면 홍콩 가격보다 두 배 이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조홍제는 면사 100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시 면사 100곤을 싣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8일간의 먼 귀국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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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홍콩과의 거래가 열리자 조홍제는 이어 홍콩에 오징어는 물론 한천 등의 물건을 배에 실어 보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금으로 현금 대신 설탕, 알루미늄 괴, 면사, 한약재, 염료, 향료 등 수백 종의 물품을 수입해왔다. 특히 설탕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그 주 고객은 오리온제과의 이양구였다.
'일단 부딪히고 보아야 한다'라는 이때의 경험은 제일제당의 건설, 제일모직의 창업에도 적용되었다.
홍콩과의 무역 이후인 1년 반만인 1950년 3월의 결산에서 이병철은 1억2천만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당시 상공부에 등록된 543개 무역업체 중 7위였다.
당시 무역업체 순위를 보면 1위가 전택보씨가 운영하던 천우사였고 2위는 동아상사, 3위는 대한물산, 4위는 박흥식의 화신산업, 5위는 경향실업, 6위는 남선무역이었고 삼성물산은 7위였다.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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