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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봄] 노인이 꾸는 꿈

2023-09-26
[마음·봄] 노인이 꾸는 꿈

[마음·봄] 노인이 꾸는 꿈
곽호순 (곽호순병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 식구 둘러앉아 커다란 수박 먹다 말고 입 안 가득 감추고 나와서 가만히 수박 씨앗 파묻어 둔 곳, 싸리 울타리 팔 뻗어 감아 오르던 나팔꽃 옆자리, 나만 아는 그곳. 소나기 지나간 후 무지개 뜨면, 무지개 끝 사라진 곳이 분명 친구 집 지붕 너머 어디쯤일 거라고 실눈 뜨고 눈짐작으로 찜해둔 나만 찾을 수 있는 그곳. 하늘로 연 날리다가 바람에 연 떨어진 자리를 담쟁이 잎 같은 손바닥으로 이마 햇볕 가리고 단단히 봐 둔 곳, 꼭 찾아야 하는 나의 방패연.

내가 텀벙대다가 흐려진 물 때문에 물풀 사이로 사라진 버들피리, 흙탕물이 주저앉기까지 가만히 기다리다 말갛게 비친 친구 얼굴 쳐다보고 웃느라 결국 놓쳐버린 버들피리 숨어있는 곳. 어디든 축축한 땅을 파면 어김없이 나오던 땅강아지, 움켜잡다 그 힘센 앞발에 깜짝 놀라 후다닥 던져 버린 후, 눈여겨봐 뒀던 땅강아지 사라진 구멍. 술래잡기하다 친구는 가버리고 나만 심심해져 뒷마당 깊은 우물에 몸 반쯤 걸친 채 괜히 소리 한번 질러 보면 내가 우물을 내려다보는지 우물이 날 쳐다보는지, 무서워 침 뱉은 우물 자리. 아직도 맑은 물이 고여 있는지…. 겨울바람에 손을 호호 불어가며 구슬을 치다 수챗구멍으로 빠져 버린 아끼던 구슬,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보배 구슬 먹어 버린 그 검은 구멍. 아직 그곳에 그대로 있는지….

눈 오는 날 그 언덕길. 비료 포대 넓게 펴 동무들과 두 발 뻗치고 노루 새끼처럼 쏜살같이 내려오던, 바람은 불어도 토끼털 귀마개로 춥지 않던 겨울. 올라가는 길은 연탄재 낮게 깔려 있던 기억의 언덕길. 갈래머리 땋은 애와 소꿉 살림 살다 셈난 친구 훼방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온 기와 빻은 흙과 사금파리 조각 그릇들. 말간 행주로 장독 닦고 있는 엄마 앞치마 붙들고 엿 사달라고 보챌 때 그때 장독 뚜껑을 타고 내려오던 쨍한 가을 햇볕 한줄기. 땅따먹기 놀이하면서 고사리손 한 뼘 길이로 그은 금. 그 금 둘러친 면적만큼 큼직하던 내 땅. 아직도 그 금 그어져 있는지…. 나른한 일요일이면 늘 들리던 손목 하얀 이층집 계집아이가 치던 피아노 소리. 배고픈 저녁 답이면 길게 나를 부르던 엄마 목소리, 그 소리들 아직 그곳에 있는지….

잊히지 않고 새겨진 이 기억들은 은빛 비늘을 두르고 등지느러미 힘차게 저으며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 헤엄치고 있는데, 내 마음의 그물에 아직도 걸려 있는 그 귀한 것들을 언제 날 잡아 찾으러 간다고 벼르다 우물쭈물하다, 이젠 다 커버렸습니다. 이젠 늙어버렸습니다.

곽호순 〈곽호순병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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