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
내 고향은 경북이지만 어렸을 때 서울로 이사하여 30여 년을 그곳에서 생활했기에 지금 이 지역에는 친구가 별로 없다. 더구나 직장에서 은퇴한 지금은 가끔 만나는 친구도 크게 줄었다. 그 와중에 가까이 살며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는 내게 아주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고 또 나를 자극해주는 도반이기도 하다. 그 친구가 얼마 전 앞산 둘레길을 산책하면서 마주치는 노인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지나간 삶을 보고 그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했다. 나도 가끔 집 주위 임도를 산책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곤 하는데, 그들을 영웅으로 보기는커녕 나에게 피해를 주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존재로 보곤 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 친구는 만나는 타인들을 이 시대의 영웅으로 보는데 나는 그러지 못할까?
인도의 수도승 가우르 고팔 다스는 '아무도 빌려주지 않는 인생 책'에서 "모든 인간의 본성은 아이스크림과 촛불 사이에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아이스크림은 쾌락주의를 상징한다. 즉 녹아내리기 전에 자신의 인생을 즐기라는 의미다. 반면 촛불은 아이스크림과 같이 녹아내리지만 녹아내리면서 빛을 비춘다. 즉 인간의 이타적 본성을 나타낸다. 고팔 다스는 모든 인간은 완전히 이기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이타적일 수도 없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만 타인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즐기기 위해 존재한다. 삶을 즐기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자연과 타인이 주는 것을 받으며 감사하며 즐기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내가 가진 것을 주면서 즐기는 것이다.
고팔 다스는 "받는 사람은 잘 먹을 수 있지만 주는 사람은 잘 잘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받는 사람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주는 사람은 멋진 삶을 살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나누고 배려하는 것 속에는 마법같이 놀라운 것이 숨겨져 있다. 삶의 만족감과 충만함이 그것이다.
이타적 사고와 행위를 통한 만족감과 충만함을 말로 가르치기는 어렵다. 실제로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방법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장애인 시설에 가서 장애우를 목욕시키는 봉사를 실천한 직장 동료가 있었다. 그 동료의 아이들은 아마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아이들이 느껴보지 못하는 만족감과 충만함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미국의 뇌과학자인 리사 펠드먼 배럿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당신의 뇌는 언제나 예측하고 있다. 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신체의 에너지 수요를 예측해 당신이 생명과 안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홀로 숲속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때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늘 그랬듯이 전두엽은 예측을 시작한다. 예컨대 '근처에 멧돼지가 있다.' 이런 예측은 당신이 멧돼지를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이와 동시에 전두엽에서는 도망칠 준비를 하느라 심박 수가 증가하고 혈관이 확장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혈액이 갑자기 쇄도하면 내수용 감각이 발생하므로, 뇌는 이런 감각도 예측하게 된다. 그 결과 전두엽은 멧돼지, 신체 변화, 신체 감각을 시뮬레이션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뇌가 예측 기계로 만들어진 것은 전두엽이 수백만 년간의 구석기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예측의 대부분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저녁거리로 먹을 사냥 대상이라기보다 나를 잡아먹을 맹수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었다. 뇌가 예측 기계라는 배럿의 주장을 읽고 나니 이기심에 대한 죄책감은 많이 완화되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은 지옥으로 경험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오직 그 지옥을 통해 진정한 만족감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사실 '나'라고 믿는 분리된 주체가 없다면 아이스크림이 곧 촛불이고 촛불이 곧 아이스크림이다. 주는 나도 없고 받는 당신도 없으며 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촛불의 만족감과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는 삶은 그 얼마나 가련한가?
대구교대 명예교수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