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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영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코타키나발루의 봄 (하)

2024-01-02
[2024 영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코타키나발루의 봄 (하)
변미영 作


*
처음에는 나비인가 싶다. 하얗고 가볍고 날개 달린 무언가가 공중에서 나선형을 그리며 배춘자 씨 무릎 위로 내려앉는다. 접은 이음매가 말끔하지 않은 종이비행기. 빨간 멜빵바지를 입은 어린애가 우리 쪽과 저만치 할머니인 듯한 노인을 번갈아본다. 배춘자 씨가 아이더러 오라고 손짓한다. 아이가 한걸음 물러나며 애먼 나를 쳐다본다.

배춘자 씨가 아이 손을 잡아 끌어당긴다. 아이가 엉거주춤 당겨온다. 배춘자 씨가 먼지 묻어 시커먼 아이의 손바닥을 털다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아이 손을 마디마디 닦는다. 학생, 시간 재는 거 스톱, 스톱. 네네. 배춘자 씨가 홍보물 거치대로 팔을 뻗어 책자 하나를 집는다. 거기서 한 면을 찢더니 눈 깜짝하는 새 아이 것에 비교도 안 되게 말끔한 종이비행기 하나를 접어낸다. 배춘자 씨가 그걸 아이 손바닥 위에 올려준다. 아이는 분홍색 혀를 있는 대로 빼서 한 바퀴 돌리더니 깨금발로 뛰어간다.

아이 뒤통수 너머로 아이 할머니를 보며 배춘자 씨가 혀를 끌끌 찬다. 저이도 나처럼 할마인가 보네. 학생은 할마 알아요? 네네, 할머니엄마 아닌가요. 몸을 돌려 창을 마주하고 똑바로 앉은 배춘자 씨가 창밖을 멀리 보며 무릎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낀다. 참아야 하던 시절의 참았던 이야기를 꺼낼 때 노인들은 잘 이런다. 참아야 하던 시절, 배춘자 씨는 삼 남매가 있어 참을 수 있었다. 배춘자 씨는 참으며 죽을힘 다해 삼 남매를 키웠다. 잘 자란 삼 남매는 사회에 나가 돈을 벌어오기 시작했고 줄줄이 아이를 낳았다. 자식들은 직장보다 배춘자 씨 집 가까이 살기를 원했다. 아이들을 맡기기 위해서.

참아야 하던 시절, 배춘자 씨에게 참을 수 있는 이유가 되어 준 삼 남매는 이제 배춘자 씨가 참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 배춘자 씨는 또 참으며 죽을힘 다해 일곱 손주를 키웠다. 배춘자 씨에게 더는 아이들을 맡기지 않아도 되면서 삼 남매는 도심 가까이 이사하며 멀어져갔다. 큰손주가 아기를 낳아 증손주가 생긴 배춘자 씨는 참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당신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었다. 장남 환갑에 맞춰 삼 남매와 손주들이 함께 비행기 타고 어디로 놀러 간다고 할 때까지도 그랬다. 놀러 가는 일주일 동안 증손주를 좀 봐달라고 할 때까지도 그랬다. 아기가 순해서 손 갈 것 하나 없다는 별말 아닌 말에 더는 참지 못하게 된 배춘자 씨가 삼 남매를 모아놓고 소리쳤다.


내 인생이 이제사 봄날인데! 이 우라질 눔들아.


*

일련번호: 31
날짜: 10월 10일
이름: 배춘자
나이: 1939년생
메모: 날마다 봄날 같으라고, 춘자

평상(노인들이 이리 부르는)에 다리 뻗고 앉아 태블릿으로 좀 더 가까워진 그랜드 캐니언(A Bigger Grand Canyon)을 보는데 배춘자 씨가 다가온다. 그림 볼 때면 잘 그렇듯, 나는 느끼지 못한다. 배춘자 씨가 바로 옆에서 그림을 들여다봐도 모른다. 그림을 천 원짜리 지폐 석 장이 덮고야 안다. 오늘도 15분. 네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왁자하니 웃는 노인 네댓 중 손 들어 인사해 오는 이가 있다.

정자에 드러누워 마냥 자던 내게, 대가를 치를 테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며 제일 먼저 다가왔던 황 여사. 그럴 기력도 없을뿐더러 이야기 좀 나누는 걸로 사례를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젊은 애랑 말 섞으면서 죄짓는 심정이 안 되려면 돈이라도 줘야겠다는 말에 수락했다.

하긴, 내겐 공짜로 누구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 따윈 없다. 일주일 전만 해도 그게 내 직업이었으니까. 학교 졸업 전부터 육 년이나 한 짓이니까. 젊은 애가 공항 한구석에서 이리 잠만 퍼지르고 있는 것도, 더는 그 짓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어서니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대개, 화가 많이 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서다. 이를테면, 교제를 반대하는 애인의 아버지와 극적으로 성사된 통화가 도중에 덜컥 끊겼다는 이유로…. 무능한 놈이 싹수마저 엿 바꿔 먹었냐며 애인의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자 누군가는 그 책임을 내게 물었다. 그래, 어쩌면 난 그걸로 돈을 받으니까. 누군가에게 여긴 휴대폰 이용 서비스 콜센터이니 수리 서비스 센터로 전화를 돌려주겠다고 말할 때만 해도 나는 이달의 베스트 상담사 타이틀에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나는 왜 그때 더는 참지 않기로 작심했던 걸까. 돌아보면 별말도 아닌데. 내가 결혼 못하면 네가 내 인생 책임질 거야? 그 숱한 억지와 쌍욕을 다 삭였으면서 그게 뭐라고 터진 걸까. 오냐 그래, 내가 결혼해주면 될 것 아냐! 도통 기억 안 나는데 내가 그랬다고. 씨바. 그 말도 했다고. 헤드셋을 벗어서 사무실 벽에 액자로 걸린 사훈-인내-을 향해 집어 던지며 그랬다고. 물론, 그건 생각난다. 기분 좋게 생경하던 어떤 느낌까지….

아마도 내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내 몸속에 꽁꽁 갇혀 있었을 무언가가, 몸에 난 구멍이 아닌 살갗을 찢으며 공중으로 흩뿌려지던 느낌. 찢어진 살갗으로 온몸의 피가 빠져나와 발끝을 적시는 느낌. 몸이 가붓해지면서 발이 붕 떠오르는 느낌. 그랬구나. 그게 내 몸의 전부였구나. 내 살과 피는 죄다 씨바로 만들어졌던 거구나. 내 몸을 빠져나온 그것의 힘은 위력적이어서 따라 나오던 팀장도, 팔을 붙잡던 선배도 그 세찬 날갯짓에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낮 밤 따로 없이 집보다 더 길게 머물던 회사를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길거리든 어디든 갈 곳 많고 할 일 많아 뵈는 젊은애들 천지라 나는 후드를 벗을 수 없었다. 노인들이 아침에 집을 나서 뜬금없이 공항으로 향한다는 뉴스는 광화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의 옥외 티브이로 보았다. 노인들과 나는 다를 게 없었다. 젊은 애들 눈치 보여 갈 데가 없다는 점에서.

보던 그게 뭐래요? 불이라도 났나, 천지가 벌겋드만.

내가 내미는 태블릿을 배춘자 씨가 들여다본다. 화가 이름을 알려 주니 배춘자 씨가 눈을 휘둥그레 치뜨더니 그림을 다시 들여다본다. 할매가 그림도 이리 잘 그리네. 남자가 그린 건데요. 남자? 배춘자 씨가 고개를 돌려 황 여사를 찾는다. 그 할매 이름이 뭐랬소? 누구? 왜 있잖우, 백 살도 더 먹었는데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는. 아, 호프너? 왜요? 오늘 아침에 죽었대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백사 세 나이로 스카이다이빙에 성공한 호프너 여사와 아무 연관 없을뿐더러 올해 86세로 멀쩡히 살아있다고 말하려는데, 하늘에서 뛰어내린 이가 어쩌다 그새 영영 하늘로 가버렸는지 곡절을 알기 위해 배춘자 씨가 황 여사에게로 움직인다. 학생, 잠깐만 스톱, 스톱. 네네.

저 이는 확실히 배운 사람이요. 영어 말도 아주 잘혀. 난 이제 에이비씨디 배우는데.

그림을 다시 보여 달라는 배춘자 씨에게 내가 태블릿을 건넨다. 미간에 깊은 골이 팰 정도로 그림을 신중하게 들여다보는 배춘자 씨 옆에서 나는 아주 잠깐, 혹시 비행기를 탄다면 어딜 가고 싶으냐고, 배춘자 씨가 물어오길 기대한다. 대답할 말이 있어서. 이 그림을 직접 보러 캔버라에 가고 싶어요. 운 좋으면 고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내가 진짜 학생일 때, 미대 입시생을 제치고 사생대회에서 내가 일등상을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있을지 모르고. 물론, 배춘자 씨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태블릿을 건넨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그렸나.


멀티 앵글이 접목된 작품이라 비행기를 타고 본 정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이 말은 속으로만 한다. 학생, 시간 재요. 네네. 일천구백삼십구년, 목련이 봉오리를 터뜨리는 춘삼월에 내가 태어났어요. 그래서 춘자인 건 아니고요. 날마다 봄날 같으라고 춘자요. 어제 들은 이야기부터, 배춘자 씨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리와 의자 사이에 끼워 둔 휴대폰이 진동하더니 J에게서 온 문자 앞머리가 솟는다. 여행 후보지 중 빨리 하나를 고르라고. 가을 특별 할인 기간이 오늘 끝난다는 말끝에 느낌표가 댓 개는 붙었다. 배춘자 씨가 창밖에 관객을 둔 모노드라마 배우처럼 그쪽을 향해 간간이 손발을 써가며 말하는 동안 나는 J에게 간간이 문자를 찍는다. 코타키나발루에는 길거리에 자전거 타는 사람이 없대. 뭐래. 정말이야, 찾아봤어. 설마. J에게 어제 찾은 링크를 보낸다. 뭐야, 이십 년 전 자료잖아. 잠시 후, 그로부터 이십 년 후의 정보가 담긴 링크가 전송된다.

"죽기 전에 한 번은, 코타키나발루"

코타키나발루에는 해변을 끼고 자전거를 달릴 수 있는 해변 도로가 조성되어 있고, 현지인뿐 아니라 관광객도 자전거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 대여소가 4곳이고 시청에 가면 공짜로도 빌려준다는 사실!-코타키나발루 투어 전문 코코여행사.

배춘자 씨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아 꺼내 드는 기척에 나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목을 세운다. 그게 그 냥반이 한 마지막 말이었어요. 그 냥반에 관해 알 리 없는 내가 눈을 끔뻑이자 그걸 어머, 그랬군요, 정도로 이해한 배춘자 씨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수건에다 요란하게 코를 푼다. 이제 배춘자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매직아이 그림을 보는 눈이 되어가는 배춘자 씨를 지켜보다 나는 타이머를 끈다.

*
일련번호: 34
날짜: 10월 12일
이름: 배춘자
나이: 1939년생
메모: 싫어하는 음식이 드물게도, 잔치국수

배춘자 씨가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그 사이, 나는 와 보라고 손짓하는 황 여사에게 다가간다. 그냥 말해도 배춘자 씨에게 들릴 턱이 없는데 황 여사가 굳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인다. 어제 형사가 다시 와 배선봉 씨를 찾았다고 알려주드만. 자식들이 요양원에 잘 모셨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웃기는 일이재. 그게 어찌 잘 모신 거여, 잘 가둔 거지. 배 여사한테는 말 안 하는 게 좋겠어. 한동안 옆집이었으면서 치매가 깊단 걸 어째 몰랐을꼬. 자식들한테 돈 다 빼 먹히고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것도, 그 냥반이 치매란 것도 알아봐야 뭐 좋겠어. 네네. 참, 어제는 왜 안 왔더랬수, 배 여사가 애타게 찾든데. 아버지한테 다녀왔어요.

배춘자 씨가 통화가 끝났다는 신호로 휴대폰을 들어 흔들어 보인다. 내가 옆으로 가 앉는다. 나는 일천구백삼십구년, 목련꽃 봉오리 터지는 춘삼월에 태어났어요. 그래서 이름이 춘자인 건 아니고요. 날마다 봄날같이 살라고 춘자지요. 이 말을 할 때마다 배춘자 씨가 반달눈이 된다는 걸 나는 오늘에서야 안다. 서로 몸을 완전히 틀어 정면으로 보고 있어서다. 우리 눈이 처음 포개지는 셈이다.

저는 일천구백구십팔년, 칠월 한여름에 태어났어요. 그런데 이름은 봄 햇살처럼 웃으라고…. 하이고, 어매가 더운데 학생 낳느라 고생이 많았것어요. 학생 아니에요. 학생이 아니요? 직장 다니다가 얼마 전에 잘렸어요(씨바). 회사에서 잘렸다고? 네. 이 참한 학생을 왜 자르고 그런댜(우라질 눔들이). 제가 더 참아야 했나 봐요. 참지 말아요, 그래봐야 알아주는 눔 하나 없구먼요.

배춘자 씨가 몸을 고쳐 앉는 동시에 나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비행기 뜰 시간이 되었다. 배춘자 씨가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배춘자 씨를 내려다본다. 우리 눈이 다시 포개진다. 어제 변호사를 만나고 왔는데요, 이제껏 배춘자 씨가 손주들을 키운 시간과 노동의 대가를 자식들에게 법적으로 청구할 수 있어요. 이 말은 나중에 할 참이다. 여기보다 비행기가 더 잘 보이는 전망대가 있어요. 같이 가실래요. 이 말은 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춘자 씨가 가방을 집어 긴 끈을 몸에 빗금으로 매면서 내 손을 덥석 잡는다.

거기가 어디래요, 학생.

배춘자 씨는 양손을 창유리에 붙인 채 까치발을 한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떨어질 기세지만 나는 못 본 척한다. 유도로에서 막 활주로로 들어서는 비행기 한 대가 보인다. 점차 속도를 높여 활주로를 질주하던 비행기는 더는 갈 곳이 없어 뵈는 지점에서 앞발을 치켜든다. 다리를 접고 날개를 펼친 비행기가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비행기 몸통에 쓰인 글자를 하나하나, 배춘자 씨가 허공에 검지로 짚으며 읊는다.

엠, 에이, 엘, 에이, 와이, 에스, 아이, 에이
맞아요, 코타키나발루로 가는 비행기예요.

*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 바퀴가 단단한 모래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 발에 닿을 듯 파도가 몰려와 부딪으며 거품 올리는 소리. 겁 없이 자전거 뒤에 내려앉은 갈매기가 날갯짓하는 소리. 모래성 쌓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노점 상인들이 낯선 언어로 호객하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귀 아닌 살갗을 파고든다. 내 몸 안으로 기꺼이 들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줄 것처럼.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카수아리나 나무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참이다.

탄중아루 비치를 도는 동안, J는 시청에서 공짜로 빌린 자전거 바퀴가 잘 안 나간다고 내내 툴툴댄다. 한참 뒤에 처진 채, 내가 찾는다는 게 뭔지 알아야 찾는 걸 도와줄 수 있다고 또 소리를 지른다. 내가 찾는 게 뭔지 나도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다. J와 보조를 맞추려 내가 자전거를 세운다.

반대쪽에서 다가드는 자전거 한 대. 자전거 탄 이의 얼굴이 또렷이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내 마음과 다르게 입이 인사를 건넨다. 뜨리마 까시. 뭐가 고맙다는 건지 영문 모르는 눈빛이 내게 와 잠시 박혔다가 지나간다. 자전거는, 벌건 혀를 늘어뜨린 채 씩씩대며 페달을 밟는 J의 옆을 가뿐히 지난다. 아빠 까바르. 현지어를 못 써 안달 난 J가 손 흔들어 인사하자 자전거를 탄 이도 손을 흔든다. 아빠 까바르.

나는 자전거를 아예 돌려세우고 멀어지는 자전거의 뒤를 눈으로 좇는다. J가 옆으로 와 자전거를 세우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저 노인, 백 살도 넘었겠지?

여기 코타키나발루는 내 이름처럼, 봄이다.

*

일련번호:
날짜: 10월 30일
이름: 배춘자
나이: 1939년생
시간:
전화번호: (555)7140-0148
메모: 호크니 그림을 아주 좋아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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