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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뉴스]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여한 김태봉 용사

2024-06-19
[동네뉴스]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여한 김태봉 용사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김태봉 용사.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 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김태봉(92·대구 남구 대명4동) 용사를 6·25 참전용사들의 모임 장소인 참전용사의 집에서 만났다.

김 옹은 당시 중학교 3학년으로 8월 15일에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부모님께 통보도 하지 않고, 전쟁터에 나섰다. 한 반에 10여 명은 학도병으로 지원했는데 담임선생님은 김 옹이 너무 어리다고 만류했지만, 끝까지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일반 지원 군인은 군부대에서 신병 교육을 받았지만, 학도병은 입대한 지 3일 만에 전투에 투입됐다. 김 옹은 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고, 총을 그때 처음 만져봤다고 했다.

"실탄이 나를 피해서 지금 살아 있다"고 하면서 3년 10개월 동안 군 생활을 하면서 겪은 전쟁의 참상을 전했다.

대구 포병사령부에서 전방 9사단 포병 50대대를 거쳐 함북도 초산 6사단 2연대에서 사창리 전투, 경기도 용문산 전투, 강원도 구만리 전투, 영천·안강전투 등 여러 곳을 이동하면서 싸웠다. 영천에 압록강까지 이동하면서 목이 말라 압록강 물도 먹고, 대동강 물에 세수도 했다. 중공군에 의해 후퇴할 때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기갑사단에 의해 구출됐다고 했다.

포항·안강전투에서 많은 학도병이 희생된 이야기를 하는 구순의 용사 얼굴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당시엔 군복과 군화는 광목이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해서 죽은 사람의 총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식량은 주먹밥으로 대신했다.

휴전하기 전 일선에서 정기휴가 20일을 받고, 휴가 5일을 보내는 중에 전방에서 다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다는 기별을 듣고, 신병들을 염려해 참전했다. 그때 분대원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분대장님 오셨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죽음을 무릅쓰고, 고성 진지까지 포를 쏘고 추격한 후 휴전됐다. 포병은 개인 훈장이 없는데 그때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여한 결과 훈장을 받았다.

포탄이 굉음을 내면 고막이 나갈 정도인데 포병분대장 2년 동안 귀 고막을 잃어 왼쪽 귀는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오른쪽 귀마저도 보청기에 의존한다.

김 옹은 소리를 잘못 듣다 보니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할 수 없어 한 회사에서 운전하면서 결혼해 성실하게 오늘까지 살고 있다. 결혼 생활 67년, 슬하에 4남매를 뒀다. 현재 장남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어린 나이에 오직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각오 하나로 참전한 용사들에게 더욱 감사를 전하고 싶은 6월이다.

글·사진=문순덕 시민기자 msd5613@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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