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서 대방어 양식 도전 제2의 '인생 홈런' 날려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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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야구 시키느라 고생한 어머니
좀 살만해졌을 때 떠나신게 恨 남아
은퇴 경기때 받은 입장 수익금으로
청소년 야구페스티벌 기획 대성공
야구꿈나무 지원 재단 14년째 운영
동해안 어장 관리에 많은 시행착오
이젠 노량진 경매서 최고 가격 인정
해상낚시터 지정도 받아 또 한번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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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시절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기록으로 레전드가 된 양준혁은 은퇴 후 동해안 구룡포 어장에서 대방어 양식을 하며 또 한번 '인생홈런'의 꿈을 키우고 있다.<양준혁야구재단 제공> |
양 이사장은 대구시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서울서 생활하는 요즘도 대구에 들르게 되면 고향 집이 있던 자리를 찾는다. 그가 살던 집은 현재의 방천시장 초입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자리에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는 가방 집을 운영했다. 집안은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3번의 화재를 겪으며 가세는 완전히 기울고 말았다. 식구들은 마치 유목민처럼 대봉동, 대명동, 수성동으로 이사를 다녔다. 부모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특히 아버지를 대신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어머니의 고생이 눈물겨웠다. 파출부, 단무지 장사, 섬유공장 근로자 등 가족을 지키기 위해 뼈가 부서져라 일했다.
막내였던 양 이사장도 일찌감치 '자립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초등학교 입학식부터 스스로 보호자가 되어 참석했다. 희망이라고는 좀처럼 보이지 않던 시절, 불현듯 야구가 다가왔다. 그는 미친 듯이 야구에 빠져들었지만 가난한 형편이 발목을 잡았다. 양 이사장은 야구를 단념하라는 부모에게 "동성로에 나가서 동냥이라도 할 테니 제발 야구 시켜 달라"고 설득했다.
울면서 읍소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훗날 알게 됐지만 그때 어머니는 속으로 '아, 이 놈은 야구를 할 놈이구나'라고 생각했단다.
"오늘날 야구선수 양준혁을 만든 것은 98%가 어머니 공이었어요. 어려운 형편에 헌신적으로 지원해주셨죠. 어머니는 제가 이제 좀 살 만해졌을 때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미국 여행시켜 드린다고 비자까지 받아 뒀는데 떠나지 못했어요. 그토록 원하던 손주를 안겨 드리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습니다."
◆ 은퇴경기 수익금 3천만원의 반전
삼성라이온즈 시절 양준혁은 그라운드에서 훨훨 날아다녔다. 일명 '만세타법'이라 불리는 특유의 타격 폼으로 관중을 즐겁게 했다. 3천 타석 이상 타자들 중 KBO 통산 조정 득점 창출력(wRC+) 1위, 야수의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WAR) 1위를 기록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배트를 거꾸로 들고 쳐도 3할'이라는 칭송도 쏟아졌다.
2010년 9월19일 SK와 은퇴전을 치렀다. 대구 홈경기로 치러졌는데, KBO 사상 역대급 관심을 모았다. 당시 경기는 일주일 전부터 예매가 시작됐는데, 대행사이트 서버가 단 1분 만에 마비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경기에 앞서 펼쳐진 시구 퍼포먼스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양준혁의 아버지 양철식씨가 공을 던졌는데, 당시 일흔다섯인 아버지의 공이 홈플레이트까지 제대로 꺾여 들어가자 관중과 해설자가 모두 놀랐다. 비록 0-3으로 패했지만 이날 경기는 양준혁 인생에 결정적 전환을 가져왔다.
"아마도 제가 처음이었을 거예요. 주최 측이 그날 입장 수익금 3천만원을 주더라구요. 한참 동안, 만감이 교차했지요. 이 돈을 어떻게 쓸까, 살림에 보탤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좋은 일 한번 하자고 마음을 먹었죠."
그가 기획한 '청소년야구페스티벌'은 대성공이었다. 학업에 찌든 청소년에게 쉴 틈을 주자는 순수한 생각이 통했다. 행사 타이틀에 양준혁 이름을 넣고, 대회를 경연식으로 치르자는 주변 제안을 거절하고 순수 축제로 운영해 더욱 눈길을 모았다. 이후 '야구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취지로 2011년 발족한 양준혁야구재단은 날로 성장 중이다. 다문화, 탈북민 등 사회배려층 아이들과 야구로 소통하고, 재능이 뛰어난 야구 꿈나무는 집중 지원하고 있다.
"야구재단을 운영한 지 어느새 14년이 됐습니다. 솔직히 막대한 경비마련 등 골치 아픈 일도 많지만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제가 할 수 있을 때까지 쭉 운영하고 싶습니다."
◆대방어로 꾸는 인생 2막의 꿈
선수 시절 그의 취미는 낚시였다. 깊고 푸른 동해를 바라보며 낚싯대를 드리우면 잡다한 상념은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낚시의 맛에 푹 빠진 그는 급기야 동해안 어장을 구입하기로 결심했다.
"야구선수는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잖아요. 나중에 뭘 해야 하나 고민하며 낚시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고기들이 막 날아 다니고 있더라구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아, 이거다' 하면서 제대로 꽂혔던 거죠."(웃음)
그의 어장은 우리나라 육지의 동쪽 끝에 있다. 대개 사람들이 동쪽 끝 지점을 호미곶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표지석은 그의 어장 안에 있다. 막상 어장을 구입했지만 '사업가 양준혁'으로 홀로서기까지 적잖은 시행착오도 있었다. 양식 어종을 잘못 선택해 몇 차례 실패와 좌절을 겪는 등 그동안 날려 먹은 돈만 해도 빌딩 한 채를 구입하고도 남을 정도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제 갈 길을 고집한 그는 마침내 대방어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그가 직접 사료를 주고,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키운 대방어는 지난해 노량진 수산시장 경매에서 최고가를 받으며 상품성을 인정받았다.
"대방어를 키우면서 또 한번 인생을 배웠습니다. 야구재단 운영과 대방어 양식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둘 다 자식을 키우듯 온 정성을 다해 사랑으로 키우고, 그만큼 오랜 시간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요."
양 이사장은 올 하반기 또 한번 승부를 볼 작정이다. "제 어장이 해상 낚시터로 지정을 받았어요. 올해 여름부터는 직접 포항으로 내려가 대방어 어장관리도 하고, 낚시터도 하고, 베이커리 카페도 만들 계획입니다."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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