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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하)…느릿느릿, 노포가 반기는 운하길을 걷다

2024-09-20

세계문화유산 지정 리운하문화장랑
대운하 배경으로 조성된 문화거리
화이안 옛 영화 중심도시 허샤구전
주민들 삶 묻어나는 골목 탐방 백미
다채로운 운하문화 고스란히 남아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하)…느릿느릿, 노포가 반기는 운하길을 걷다
허샤구전의 후쭈이대가. 남쪽으로 가면 대운하가, 북쪽으로 가면 화제가 나온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하)…느릿느릿, 노포가 반기는 운하길을 걷다
유악 옛집의 유악 동상. 유악은 중국 근대문학사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소설가다.

저우언라이 옛집에서 북쪽으로 걷다 보면 시창가(西長街) 대로변에서 유악의 옛집을 만날 수 있다. 유악은 우리에겐 그다지 익숙한 이름이 아니지만 중국 근대문학사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소설가다. 그의 대표작 '노잔유기(老殘遊記)'는 청나라 말의 대표적인 견책소설(譴責小說)이다. '견책'은 꾸짖는다는 뜻으로, 루쉰(魯迅)이 '중국소설사략'에서 청나라 말의 소설 가운데 현실의 부패를 폭로하며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는 소설을 가리킨 말이다.

이 소설은 노잔이라는 의사가 각지를 유람하며 관리의 무능과 사리사욕을 채우는 생태를 폭로한 고발형식의 소설이다. 특히 잘못된 신념을 가진 관리가 더욱 위험하다는 사실을 여러 사건을 통해 지적하고 있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지도자가 가장 위험하다는 항간의 우스개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유악은 의화단 사건 때 정부미를 난민 구제에 사용하였다는 죄목으로 신장(新疆)에 유배되어 죽었다. 그의 소설은 물론 생애에서도 의로움과 강직함을 느낄 수 있다 할 것이다. 그의 옛집은 그를 기리는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견책소설의 4대 걸작으로 꼽히는 '노잔유기'에 대한 설명과 그의 생애가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었다.

유악 옛집의 동쪽에는 명나라 때 건축된 회안부서(淮安府署)가 있다. 화이안이 도시로서 크게 발전한 것은 명나라 시기로 보인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의 선산이 이곳이라는 사실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회안부서는 명나라 홍무(洪武) 3년(1370)에 건축되었으며, 홍무 18년(1385)에는 주원장의 할아버지를 모신 명조릉(明祖陵)을 조성하였다. 영락(永樂) 연간(1403~1424)에는 곡창 관리관청인 청안원, 가정(嘉靖) 9년(1530)에는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도 건축되었다. 특히 청안원은 관청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한다. '강회제일원(江淮第一園)'으로 불리는 이곳은 무성한 수목과 가산(假山), 멋진 정자와 누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하)…느릿느릿, 노포가 반기는 운하길을 걷다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된 리운하의 칭장푸 갑문 표석.

청나라 때는 또 베이징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치수(治水) 관청이었던 하도총독서(河道總督署)가 이 도시에 설립됐다. 이곳이 대운하가 관통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대운하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조성된 운하이자 가장 긴 운하이다. B.C. 486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했고, 길이가 2천700㎞에 달한다. 베이징, 톈진, 허베이, 산둥, 허난 안후이, 장쑤, 저장 등 8개 지역을 지나며, 하이허(海河), 황하, 회수, 장강, 첸탕장(錢塘江) 등의 중국 5대 수계를 통과하는 고대 교통 대동맥이다. 장강과 황하, 회수를 연결하는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의 화이안 구간은 68㎞이다. 이 구역에만 93개의 지정 문화유산이 있으며,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화이안 지역에는 경항대운하 외에도 리(裏)운하, 구화이허(古淮河), 옌허(鹽河) 등 네 개의 하천이 흐른다. 여기에 중국 4대 담수호 가운데 하나인 훙쩌후(洪澤湖)를 비롯해 바이마후(白馬湖), 가오유후(高郵湖), 바오잉후(寶應湖), 리샤허후(裏下河湖) 등 호수 5개가 지류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도시 내부를 지나는 리운하에 조성한 '리운하문화장랑(裏運河文化長廊)'은 대운하를 배경으로 문화거리를 조성하여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었다. 리운하는 '안쪽 운하'라는 의미이다. 리운하의 전체 길이는 32㎞로서, 연안의 풍광이 아름답고 인문 자원 역시 풍부하다. 아울러 국가급, 성급, 시급 문화재도 100여 곳이나 돼 화이안의 운하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리운하는 화이안의 어머니로 여겨지며 '문화하(文化河)'로 불린다.

교통 요지에는 필연적으로 사람과 물자가 모이게 된다. 화이안은 수당 시기에 회수 평원에서 생산되는 세곡(稅穀)의 집산지였고, 명청 시기에는 회북염(淮北鹽) 소금의 집산과 분배 도시로 번성하였다. 대운하의 조운 기능이 쇠락한 청나라 말까지는 상하이를 능가하는 큰 도시였다. 그 영화의 중심이 바로 허샤구전(河下古鎭)이다. 이 마을은 원래 장강(長江)과 회수가 관통하여 남북을 이어주면서 흥성한 마을이었다.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지자 새로운 문화가 창조됐고, 수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명청 양대에만 이 마을에서 67명의 진사(進士), 123명의 거인(擧人), 12명의 한림(翰林)이 배출되어 '세 분야 모두 완전하다'는 의미의 '삼정갑제전(三鼎甲齊全)'으로 불렸다. 당시 남북을 왕래하는 선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하)…느릿느릿, 노포가 반기는 운하길을 걷다
후쭈이대가 골목 노포에서 차사를 만드는 아주머니.

박은 이곳을 거쳐야 했으므로 이 주위로 선박 제조창이 많이 들어섰다. 대나무 골목이라는 의미의 주샹(竹巷), 밧줄 골목 성샹(繩巷), 무쇠 골목 다톄샹(打鐵巷), 청동 골목 다퉁샹(打銅巷) 등의 거리 이름은 모두 이 지역이 선박산업의 기지였음을 보여준다. 또 창챠오샹(倉橋巷)은 당시 물류 창고 골목이었다.

허샤구전에는 앞서 보았던 오승은의 옛집 외에도 오국통중의관, 장원부(壯元府) 등의 유적이 있다. 오국통중의관은 '온병조변(溫病條辨)'의 저자이자 중의학의 대가였던 오국통의 의원이었으며, 장원부는 명나라 때 장원급제한 심곤(沈坤)의 사적과 과거(科擧) 문화를 전시한 공간이다. 장원부에는 심곤의 저택을 중심으로 장원루(壯元樓), 학문의 신 괴성(魁星)을 모신 괴성루, 정원 등이 갖춰져 있다. 그러나 허샤구전의 백미는 골목이다. '호수 주둥아리'라는 뜻의 후쭈이대가(湖嘴大街), 옷가게가 많아서 이름한 구이가, 예쁜 꽃 골목 화제(花街) 등은 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후쭈이대가 남쪽으로 가면 대운하가 나오고, 북쪽으로 가면 화제와 만난다. 이리저리 기웃거려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특히 주민들의 삶이 묻어있는 민가와 꾸질꾸질한 노포는 정겹게 말을 걸어온다. 화제에 가까울수록 젊은 친구들이 늘어났다. 화제에는 최근 오래된 가옥을 트렌디하게 리모델링한 소품 가게들이 많이 들어서서 젊은 층의 발길이 잦다고 한다. 680m 남짓의 후쭈이대가와 화샹 골목은 허샤구전의 최고 번화가다.

그렇지만 옛 정취가 더욱 짙은 골목은 구이가다. 화제 동편으로 이어진 구이가는 이름 그대로 옷가게가 많았던 골목이다. 좋게 말하면 원형이 잘 보존되었고, 다르게 말하면 아직 개발이 덜 된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더욱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다. 이 골목의 민가들은 대부분 민국 시기 이전에 지은 목조 건축이며, 도로에 깐 석판도 청나라 때 것이라고 한다. 도로에 석판을 깔았다는 것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던 번화가라는 의미이다. 실제 칭장푸가 개통돼 리운하와 연결되기 전까지 이곳은 선박이 드나드는 입구였다. 그래서 화이안의 조운업이 흥성하면서 가장 빠르게 발전했던 상업 거리였다. 선원들이 들락거리면서 각종 요리집과 여관이 들어섰고, 그들을 위한 목욕탕, 이발소, 옷가게 등이 들어섰다. 말하자면 한때 화이안의 최고 번화가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명 영락 13년에 칭장푸가 개통되면서 상권이 구이가에서 대운하 변의 후쭈이대가로 옮겨갔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또 전통 간식 차사를 먹어봐야 한다. 국수를 튀긴 것 같은 모양인데, 요즘 맛있는 과자가 워낙 많아서 맛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구수한 밀가루를 기름에 튀기기까지 했으니, 어릴 때 입천장이 벗겨지는 줄 모르고 먹었던 '라면땅'이나 '뽀빠이'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 말로는 이곳의 차사는 부드러우면서 향긋한 독특한 풍미가 있다고 자랑한다.

이처럼 화이안은 대운하를 통한 남북 교통의 중심지였으므로 여러 지역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관문이라는 뜻의 '구성통구(九省通衢)'이자, 경성으로 통하는 요충지라는 뜻의 '입경공도(入京孔道)'로 불렸다. 그래서 이백, 두보, 백거이, 유장경, 소식 등 유명 문인이 드나들며 많은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화이안에 명사들이 많은 것은 이런 사통팔달의 인문지리적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이름을 떨친 이 도시의 명사는 한신(韓信)이다. 한신은 화이인구(淮陰區)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회음후(淮陰侯)로 불렸다. 한신이 살았던 옛 마을은 한신고리(韓信故里)라는 이름으로 화이인구 마터우전(碼頭鎭)에 있다. 한신고리에서 남동쪽으로 가면 한신이 어릴 때 밥을 빌어먹었다는 빨래하는 아낙네 '표묘(漂母)'의 사당과 무덤이 있고, 근처에는 한신이 때를 기다리며 낚시를 했다는 조대(釣臺)도 있다. 근처 칭푸구에는 또 한신이 회음후가 된 후 쌓았다는 한신성(韓信城) 유적지가 있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하)…느릿느릿, 노포가 반기는 운하길을 걷다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한신과 비슷한 시기에 매승(枚乘)은 문장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매승은 서한(西漢)의 부(賦) 작가로서, '칠발(七發)'이라는 작품으로 부(賦)라는 형식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집과 묘 역시 화이인구(淮陰區)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허샤가도(河下街道)에는 매승과 아들 매고를 기념하는 매정(枚亭)이 있다. 1958년에 마터우전 하천을 정비하다가 '매승고리(枚乘故里)'라는 글씨가 적힌 비석이 발견되었고, 이를 근거로 2008년 마터우전에 매승 부자를 기념하는 '매승고리경구(枚乘故里景區)'를 조성했다. 그뿐인가. 금(金)나라에 대항해 나라를 지킨 여장부 양홍옥(梁紅玉)도 있다. 영국의 아편 밀수를 막다가 순국한 관천배(關天培)도 있다. 이처럼 화이안은 아름답고 맛있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서성이며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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