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격노하는 윤 대통령
대통령직에 있으면 웃어라
70%가 특검 원하면 받아야
클린턴의 예에서 배우고
국회·국민 말에 귀 기울여라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
"그는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엠앤엠(m&m)을 먹을 때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1993~2001 재임)이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을 묘사하며 내놓은 유머다. 엠앤엠은 미국인이면 누구나 아는 작고 동그란 초콜릿. 콩만 한 크기라 포크 나이프를 사용해 찍고 잘라 먹는 건 어불성설이다. 손바닥에 몇 알 올려 한입에 털어 넣어야 제맛일 터. 크리스토퍼 장관이 어디서나 격식을 차리는 반듯한 사람이라는 걸 클린턴은 딱 한 문장으로, 재치 있게 그려낸 것이다. 또 다른 일화. 행사장에서 한 각료가 대통령을 소개하며 한껏 치켜세웠다. 이어 연단에 오른 클린턴, "내 정치 원칙 중 하나는 가능하면 고위직에 임명한 사람으로부터 소개를 받으라는 겁니다. 그들의 '객관성'은 정말로 놀랍기 때문!"이라고 말해 한바탕 청중의 폭소를 끌어냈다. ('대통령의 위트' 밥 돌, 아테네 2007)
# 임기 내내 특검에 시달린 대통령
사실 여기서 더 놀라운 건 클린턴 자신의 처지다. 유머와 위트로 사람들을 웃기고 휘어잡았지만 정작 본인은 특별검사의 전방위 수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청문회와 법정에 불려가 증언을 했고 영부인 힐러리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취임 1년 만에 그들 부부는 아칸소주 지사 시절의 부동산회사 대출 비리 의혹과 관련한 화이트워터 게이트로 특검 수사 대상이 됐다. 특검은 이후 덩치를 키워 트래블 게이트, 파일 게이트를 지나 지퍼게이트에 모니카 르윈스키 성 추문까지 거침없이 파헤쳐나갔다. 힐러리의 국정 개입 의혹도 끊임없이 대통령 발목을 잡았다. 취임 첫해와 달리 상하 양원이 모두 공화당 우위, 여소야대 국회가 된 것도 언제나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핸디캡 속에서도 클린턴이 낸 성과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20세기 들어 가장 낮은 실업률을 기록했고 1천800만 개의 새 일자리를 창출했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으로는 루스벨트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하고 1969년 이래 최초로 흑자 예산을 기록했다. 30년 만의 최저 인플레이션, 미국 역사상 최고 주택 보급률도 세웠다. FBI는 클린턴 재임 때 정부가 기록을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범죄율, 살인사건 희생자 수를 보였다고 발표했다. 반자동 무기 수입을 금지하고 권총 폭력 방지법이 시행된 덕이었다. 특검은 온갖 뒤꽁무니를 캐고, 의회는 견제하고, 언론은 야유하며, 연방 관리들은 감축 반대 보이콧을 벌이는 와중에 만들어낸 혁혁한 성과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반대자 입장에 섰던 사람 여럿을 내각 인사로 불렀고 첫 내각엔 흑인 2, 히스패닉 2, 여성 3명을 포함해 '인종의 용광로' '미국적인' 내각을 국민 앞에 선보였다.
# 듣고 이해하고 느끼는 인간
클린턴의 이런 힘은 어디서 왔는가. 그는 끊임없이 귀 기울여 듣고 토론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했다. 취임 초기 그는 일주일에 두 번, 40명 이상 시민들을 백악관에 초청해 함께 식사했다. 빙 둘러앉아 모두와 대화하며 제3자 입장에서 그들의 얘기를 이해하려 애썼다. 거의 매주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정 구상을 발표하고 텔레비전 기자회견을 했다. 자신의 계획과 우선 처리하고자 하는 일, 그걸 함으로써 국가가 어떻게 발전되어 가야 하는가에 대한 희망과 청사진을 연설과 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다.
중요한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태스크 포스 팀을 만들어 운영하며 청문회를 통해 증언을 듣고 아이디어를 모아 세부적인 계획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만든 계획도 백악관의 하급자들과 고문, 친구와 전문가들에게 다시 의견을 물어 수정했다. 클린턴은 정책에 관한 한 '절반이라도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생각했다. 반대에 부딪히면 신속하게 타협에 응했고 국민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자신의 목소리를 죽였다. 그래서일까. 대다수 국민은 마음속으로 클린턴을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고 자신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성적표' 찰스 파버, 혜안 2003) 하원에서의 탄핵안 통과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의 퇴임 직전 국민 지지율은 66%라는 경이적 수치를 기록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높았다.
# 수렁에 빠진 윤 대통령
이 짧은 칼럼의 절반 이상을 옛 미국 대통령 이야기로 끌어간 이유는 자명하다. 클린턴이, 그 부부가 처한 상황이 지금 윤석열 대통령과 그 부인이 처한 상황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둘 다 특검과 탄핵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다. 대통령과 함께 정치를 이끌어야 할 한 축인 국회는 여소야대로 대통령 견제가 극심하다. 힐러리처럼 김건희 여사도 활동적, 정치적이며(한때 김 여사는 본받고 싶은 영부인 롤모델로 힐러리를 꼽았다는 얘기도 있다) 영부인이 되기 전의 축재 비리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증폭되는 양상이다. 부부에게 쏟아지는 도덕적 비난도 20년 전 미국 대통령이나 지금 한국 대통령이 받는 수준이 거의 같거나 더 커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너무나 완벽히 다르다. 윤 대통령은 자신과 부인을 향한 특검 수사 수용 요구를 거부하는 데에 온 정치적 힘을 쏟는 것처럼 보인다. 국회나 국민에 대한 설득과 경청, 공감보다는 한 줌이 안 되는 용산 대통령실 사람들의 방패막 속에 숨어 섬처럼 지낸다는 비판을 듣는다. 클린턴이 자신조차 웃음거리로 만드는 유머·위트를 뿌리며 국민과 주변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면 윤 대통령은 걸핏하면 격노, 또 격노했다는 얘기만 들린다. 나라의 경축 행사에서 '반국가 반대한민국 어둠의 세력' 운운해 모두를 뜨악하게 하고 의료대란 공포가 커지는데도 클린턴처럼 자기 목소리를 죽여 절반이라도 얻어내려는 생각을 안 한다. 엄연히 국민이 표로 만들어준 국회를 대놓고 무시하며 역사상 가장 거부권을 많이 행사한 기록을 매번 새로 세우고 있다. 심지어는 자기를 받치는 근간인 여당과의 대화도 기피하는 양상을 보인다.
# 반환점을 돌면 레임덕
마침 오늘, 24일 대통령실과 여당 중진들이 용산에서 만찬 회동을 한다. 그게 지나면 곧 임기의 반환점을 돌고 역대 누구도 못 피한 레임덕에 빠진다. 제발 국민과 국회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라. 국민의 70%가 원하는 특검이라면 받아야 옳다. 그리고 웃어라. 대통령직에 있는 사람은 울지 못하니까 웃는 법이다. 클린턴 대통령의 예에서 배워라. 그러면 지지율 20% 초라한 성적도 금방 메꿀 수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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