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40924010002910

영남일보TV

[길형식의 길] 향촌 르네상스

2024-09-25

[길형식의 길] 향촌 르네상스
길형식 거리활동가

지역 사람들은 도시의 중심 혹은 시가지를 '시내'라 부른다. 현재 단일 도심 체제인 대구 사람들에게 '시내'는 누가 뭐래도 동성로이다, 하지만 과거 대구 사람들에게 있어서 '시내'는 엄연히 향촌동이었다. 아름답고 향기롭게 변화한 곳이라 하여 '향촌(香村)'이라 전해지는 향촌동은 한때 대한민국 서울 무교동, 부산 남포동과 함께 3대 주점가로 명성을 떨쳤다. 한때 대구시민들 사이에서는 섬유 경기의 여파가 그날 저녁 향촌동 주점에 나타나고, 다음 날 서문시장 매상고에 반영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한다.

일제강점기 무라카미쵸(村上町)라고 불렸던 이곳은 각종 일식당, 여관, 요정이 즐비했는데, 해방 후 향촌동(香村洞)으로 개명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1950년대 초 대구는 6·25전쟁을 피해 내려온 전국의 피란민으로 들끓었는데, 덕분에 향촌동의 다방과 살롱엔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들로 북적했다. 당시를 대구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였다고 일컫는다. 1960·70년대는 황금마차를 필두로 아방궁, 궁전과 같은 비어홀이 유행이었다. 더불어 고구마식당, 대안식당과 같은 학사주점은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은 세계를 휩쓴 디스코 열풍에 판코리아, 초원의 집 등의 디스코텍이 전성기를 누렸다. 1980년대 초에 이르러 디스코텍 '초원의 집' 화재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데, 이 사건을 기점으로 향촌동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동성로에 '시내'의 왕좌를 빼앗긴 후 추억의 장소로 전락한 향촌동은 과거의 화려했던 상권을 잃고, 젊은이의 발길이 끊겨 간혹 향수에 젖은 손님들을 제외하곤 찾는 이 없는 한적한 구도심이 되어버렸다. 섬처럼 철저히 고립된 향촌동은 시니어들만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가격이 저렴한 음식점들과 성인텍은 노인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낮아진 임대료 덕분에 젊은이들이 유입되며 향촌동 일대 곳곳에 카페, 갤러리, 편집숍이 생겨나며 기존의 오래된 가게들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냈다. 지자체의 도시 재생에 대한 의지와 노력 또한 더해지며 작지 않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SNS도 한몫했다. 덕분에 현재 향촌동은 대구 도시 재생의 거점이자 대구 근대 골목 투어 명소로서 재조명되고 있다.

얼마 전 도심 활성화를 위해 지정된 '동성로 관광특구 지정'에 향촌동 일대도 포함됐다. 이는 향촌동의 재도약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구란 도시의 흥망성쇠가 모두 담겨있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유일한 동네 향촌동. 향촌 르네상스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길형식 거리활동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