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
안동에서 풍산읍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아름다운 정자 한 채가 있다. 체화정이다. 체화(체華)는 형제를 뜻하는 한자다. 이곳에서 18세기 영조 때 진사를 지낸 이민적이 맏형 민정과 형제의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정자를 지을 때 앞쪽에 연못을 만들고 못 가운데 세 개의 작은 섬을 만들었다. 이는 삼신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연못은 정자라는 건축물이 들어서기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 위쪽에 맑은 물이 솟는 우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나는 어린 시절을 풍산에서 보냈는데 어른들은 이 연못 속에 소(沼)가 있다고 했다. 사철 물이 솟는 이 소에 발을 잘못 들였다가는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해서 잔뜩 겁을 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연못에서 솟아오른 물은 도랑을 통해 풍산읍을 따라 읍사무소 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풍산에서 가게를 하던 아버지는 여름이면 족대로 좁다란 도랑을 오가는 민물 뱀장어와 팔뚝만 한 붕어들을 잡았다. 경북 내륙지방의 뱀장어가 알을 낳기 위해 먼 필리핀 앞바다까지 간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체화정에 가게 되거든 당호 안쪽에 걸린 담락재(湛樂齋)라는 현판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금강산과 오대산 등 절경을 화폭에 담아냈고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로 알려진 단원 김홍도가 이곳에 들러 남긴 글씨다. 단원은 안동의 안기 찰방(察訪)이라는 그리 높지 않은 직책을 얻어 왔다가 체화정의 단아한 풍취에 감복해 글씨를 남겼을 것이다. 주인장은 아마 정성을 다해 주안상을 내놓았을 것이고. 일찍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이와 함께 빠뜨리지 말고 봐야 할 것은 체화정의 창호다. 정자 온돌방에는 멋스러운 팔각창이 양쪽에 달려 있고 그 가운데 앙증맞은 창을 하나 더 만들어 달았다. 다른 한옥에서는 보기 드문 눈곱째기창이다. 이 정자의 주인은 겨울에 큰 문을 열지 않고 이 눈곱째기창을 열고 바깥에 누가 왔는지, 눈이 내리는지 내리지 않는지 바라보았을 것이다. 눈곱처럼 작은 창을 살짝 열고 한여름에 연못에 연꽃이 핀 것을 감상했을 수도 있다. 옛사람들의 작은 지혜가 오늘날에 와서는 큰 깨달음처럼 여겨진다. 하회마을이나 병산서원을 가는 길에 이 체화정 눈곱째기창을 놓치고 가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체화정은 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돌계단을 만들어 평지보다 조금 높게 정자를 앉혔다. 정자 양쪽에 배롱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는데 그 매끈한 줄기를 보면 심은 지 족히 300년은 넘어 보인다. 병산서원 뒤뜰의 배롱나무와 손뼘을 재며 비교해 봐도 좋을 것이다. 체화정을 지은 이의 벼슬은 진사에 그쳤지만 우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의 병산서원을 흠모하고 따르고 싶었을까. 벼슬과 상관없이 체화정은 체화정대로 아름답다. 위세를 부리며 거들먹거리는 듯한 자세가 없어 더욱 그렇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생전에 목수 일을 하셨다. 어느 해 봄 체화정 보수 공사를 하러 오신 적이 있다. 체화정 툇마루의 나뭇결을 쓰다듬으며 나는 나 혼자 외할아버지의 손길을 느껴본다. 눈곱째기창의 부서진 문살에도 외할아버지의 손이 닿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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