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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과 책상 사이] '조락'의 뜻을 아시나요?

2024-10-28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선생님, 이 녀석 정말 문제 많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에서 '고부'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어휘력이 형편없습니다. 어릴 때 책을 적게 읽은 것도 아닌데 건성으로 본 모양입니다. 제대로 독서 지도를 못한 제 책임도 큽니다." "어머니, 대부분 학생이 '고부'라는 단어 모를 겁니다. 자네도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다 비슷하네."

아들의 국어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어머니가 고2 학생을 데리고 와서 함께 나눈 대화다. 수능시험이 쉬운 기조를 유지하지만, 국어는 출제 경향에 따라 등락 폭이 큰 과목 중 하나다. 최상위권 학생 중에는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보다는 국어 점수가 안 나와 원하는 대학에 못 가는 경우가 많다. 수학이나 과학은 대개 투자한 시간에 비례해서 성적이 나오지만, 국어는 과외를 받고 문제집을 많이 풀어도 크게 효과가 없기 때문에 더 힘든 과목이다. 영어시험을 치고 나서 일부 학생이 해석은 되는데 틀렸다며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십중팔구 우리글에 대한 독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어를 잘해야 최고 수준의 영문을 이해할 수 있다. 읽기와 문해력은 모든 공부의 기초이고, 그 능력은 시간을 두고 꾸준히 노력해야 배양할 수 있다.

모든 공부는 정확한 '용어 정의(term definition)'에서 출발한다. 용어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아야 내용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나는 초임 교사 때 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늘 강조했다. 내 담당 과목은 영어지만, 모든 과목을 공부할 때 사전 찾기를 생활화하는 습관을 길러 주고 싶었다. 내가 들어가는 교실의 학생들에게 "앞으로 내 시간에 국어사전, 영한사전, 영영사전, 옥편을 책상 위에 올려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쫓아낼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국어와 사회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 등 모든 시간에 사전을 찾아볼 일이 많다. 핵심 용어는 사전을 통해 그 뜻을 정확히 알면 개념 파악과 이해에 도움이 된다. 그때 배웠던 학생들이 지금도 만나면 사전 찾기와 정확한 개념 파악 훈련이 그 이후의 공부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요즘 학생들은 사전을 잘 활용하지도 않고 가지고 다니는 학생도 거의 없다. 영어 단어장이나 국어 낱말 노트를 만드는 학생도 드물다. 급하면 휴대전화기로 검색하지만, 이조차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다양한 시청각 기자재의 도움으로 영어 듣기와 말하기는 아날로그 세대보다 훨씬 낫다. 반면에 문장 독해력은 부모님 세대보다 떨어진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책상에서 국어사전 두 종류를 가져왔다. 학생에게 한 사전에서 '고부'를 찾게 했다. 괄호 속에 '고부(姑婦)'라는 한자가 적혀 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한자가 병기되어 있어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다음에는 '우리말 한자어 속뜻 사전(전광진)'에서 같은 낱말을 찾았다. '고부'와 함께 괄호 속에는 '시어머니 고(姑), 며느리 부(婦)'라고 한자의 훈(訓)과 음(音)이 적혀 있었다. 훈(訓)은 글자의 새김(뜻)을 말하고, 음(音)은 글자의 소리를 말한다. 훈(訓)으로 뜻을 명확히 알 수 있으니, 학생과 어머니가 신기해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51만여 낱말 중 57%가 한자다. 한글 전용을 주장하며 '비행기'를 '날틀'로 표기하자던 최현배 선생 방식으로 모든 한자어를 고칠 수는 없다. 한자를 쓸 줄은 몰라도 '훈'과 '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어휘력 향상에 아주 도움이 된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질문을 했다. "가을을 '조락의 계절'이라 합니다. '조락'이 무슨 뜻인지 설명할 수 있나요?" 나는 대답을 듣기 전에 이번에는 휴대전화기로 같이 찾아보자고 했다. 네이버 검색 창에서 '조락'을 찾았다. '조락(凋落)'과 함께 '초목의 잎 따위가 시들어 떨어짐'이라고 적혀있었다. 대부분 사람은 이것만 보고 끝낸다. '조락(凋落)' 위에 손가락을 터치하게 했다. 이번에는 '조락'의 '락'자 오른쪽 상단에 작은 글씨로 2가 적혀있었다. 그 옆에 한자 '凋落'이 있다. 손가락으로 한자 '凋'를 터치하면 '시들 조'가 뜨고, '落'을 터치하면 '떨어질 락(낙)'이라고 뜬다. '시들어 떨어진다'만 알면 '조락'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평소 글을 읽다가 잠시 틈이 날 때 이런 식으로 낱말을 찾아보는 습관을 지니면 어휘력이 크게 향상될 것이다.

독서의 계절 '조락의 가을'이다. 영상매체가 활자매체를 압도하는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그 역기능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시점에서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정말 반가운 국가적 경사다.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배우고 익혀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선도하는 젊은 작가가 많이 나오길 소망해 본다.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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