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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시론] 세계의 기억 삼국유사

2024-10-31

[영남시론] 세계의 기억 삼국유사
이은경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인각사(麟角寺)는 도끼로 내려친 듯한 수직의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싼 아래, 위천(渭川)이 반달 모양으로 돌아나가는 곳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인각은 '기린 뿔'이란 뜻이다. "동구(洞口)에 석벽(石壁)이 촉립(矗立) 해 있는데, 기린이 그 위에 뿔을 걸어 두었다"는 인각사의 유래가 전한다.

"바위 위에 뿔을 걸어 둔다"는 것은 당나라 운거도응선사의 선문답인 '영양괘각(羚羊掛角)'에 나오는 말이다. 영양은 밤에 잠을 잘 때 숨기에 알맞은 나무를 찾아서 힘껏 뛰어올라 뿔을 나무에 걸어서 다리를 땅에 내려놓지 않는다. 자취를 뒤쫓아 오던 사냥개가 갑자기 나뭇가지에 뿔을 걸고 있는 영양을 만나면 그 흔적조차 느끼지 못한다.

일연 선사는 1283년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개경에서 인각사로 내려왔다. 이곳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완성했고 입적하기 전까지 5년 동안 머물렀다. 기린이 바위 사이에 뿔을 걸고 숨듯, 일연은 만년에 이곳에서 은둔하다 흔적 없이 삶을 마치고자 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삶을 원했던 그는 삼국유사에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삼국유사 마지막 권의 첫머리에 '일연이 편찬했다'는 기록이 발견돼 저자가 일연임을 알 수 있었고, 그것마저도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존경의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적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신이(神異), 민담, 설화 등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한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의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다. 이 책이 전해준 14수의 향가는 한문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우리말의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후 한글 창제를 촉발하기도 했다. 여성과 일반 민중으로 중심으로 한 미시사(微視史) 중심의 기술 방식, 불교라는 종교적 관점 역시 삼국유사의 중요한 가치로 꼽힌다. 또한, 일연은 고려 말 몽골 충격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단군을 중심으로 하나의 민족을 설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단군이 세운 고조선의 역사부터 고려의 주체적 역사로 설정했다.

군위군과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이 삼국유사의 세계기록유산 국제목록 등재에 나선다. 다음 달 공모 신청을 하고 2025년 2월 등재 신청 대상에 선정되면, 유네스코의 심사를 거쳐 2027년 상반기 국제목록으로 결정된다. 이를 위해 지난 4월 등재추진단을 구성하고 세미나와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등재 논리를 가다듬는 등 체계적인 준비에 힘을 쏟아왔다.

세계기록유산 국제목록 등재는 인류 발전사에서 삼국유사의 세계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국가가 공공의료를 책임진다는 것을 천명한 최초의 기록물로서 동의보감,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전과 이후 동아시아의 새로운 재편에 대한 기억이라는 의미로서의 난중일기가 그 예다. 지금, 새삼스럽게 삼국유사의 의미와 가치를 짚어보는 이유다.

이 가을, 단풍이 짙어지면 호젓한 인각사에 한번 들러봐야겠다. 귀한 오석(烏石)과 왕희지 서체의 일연 선사 비석도 구경하고 순례길 '일연 테마로드'도 걸어볼 참이다. 아침에 해가 뜨면 햇살이 선사의 부도에 반사되면서 맞은편 능선에 자리 잡은 어머니의 무덤을 비추고, 밤이 되어 사찰 석등에 불을 밝히면 그 불빛이 선사의 부도에 반사된 뒤 다시 어머니의 무덤을 비춘다고 한다. 그 애틋한 효심을 따라 무덤과 부도를 걷는 길이 일연 테마로드다.

이은경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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