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확 달라진 연말풍경 (1) '흥청망청 연말'은 옛말…소박한 즐거움으로 수고한 나를 토닥토닥
"올 연말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려 해요. 집에서 일기를 쓰며 한 해를 돌아보려 합니다."
연말 풍경이 변하고 있다. '연말=송년회' 공식이 깨졌다. 개인의 삶과 가치관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회식 등 대규모 모임보다는 각자의 방식으로 소소하게 즐기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글쓰기로 조용히 한 해 정리하거나
홀로 겨울여행 떠나 내면휴식 즐겨
고물가로 외식보다 홈파티 선호 영향
유통업계 간편식품·주류 특가행사
일회용품 줄이는 친환경 소비 늘고
공동체 관심 커져 소외이웃 배려도
◆휴식·가족 모임…소소한 일상 계획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해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연말 분위기 및 연말 계획 관련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10명 중 8명(77.7%)은 "한 해를 차분하게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요즘 연말은 연말 같지 않다'(58.0%)는 응답도 적지 않았다. '연말이라고 해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52.1%)도 상당 비중을 차지했다. 연말 분위기에 마냥 들떠있기보다 조용히 한 해를 잘 마무리하는 데 집중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연말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집에서 휴식'(50.8%)이란 답변이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가족 모임(41.5%), 송년회(33.0%), 국내 여행(17.9%) 등 순으로 나타났다. 대구 수성구에 사는 박선영(25)씨는 "사내에서도 연말이라 해서 저녁 회식을 하고 술자리를 가지는 분위기가 아니다. 근사한 식당에서 점심을 다 같이 먹는 정도"라며 "휴가를 쓰고 집에서 휴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울산 남구 박정미(54)씨도 "이제 연말은 연말일뿐 그리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가 편한 방식으로 보내면 그게 특별한 이벤트가 아닐까"라며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려고 한다"고 말했다.
◆고물가에 외식보다 '홈파티', 일찍 귀가
바뀐 외식문화와 지속되는 고물가에 외식보다 소규모 홈파티를 계획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2020년 100이었던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 10월 114.7까지 상승했다. 과거 이맘 때쯤 대구 동성로, 수성못 등에 위치한 유명 레스토랑을 즐겨 찾던 소비자들은 밀키트, 배달 등으로 홈파티를 하는 쪽을 고려하고 있다. 대구 중구에 거주하는 김성경(27)씨는 "요즘 네 명이서 술집만 가도 10만원이 훌쩍 넘게 나온다. 주류값도 너무 올라서 부담이 된다"며 "비교적 저렴하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홈파티를 즐기려 한다. 백화점 등에 할인 혜택도 많은 것 같아 직접 장을 볼 생각"이라고 했다.
이런 분위기에 유통업계도 연말 시즌을 맞아 홈파티 고객 잡기에 나섰다. 롯데와 신세계의 편의점 세븐일레븐과 이마트24는 '홈파티족'을 겨냥한 판촉전에 돌입했다. 롯데그룹 계열 세븐일레븐은 이달 한 달간 한정판 케이크와 디저트 13종을 선보인다고 지난 1일 밝혔다. 신세계그룹 계열 이마트24는 12월 '슈퍼 홈파티 페스타'를 마련했다. 와인과 위스키를 비롯한 26종의 주류 상품을 최대 50% 할인하고 카카오페이로 결제 시 추가로 결제금액의 20%를 되돌려준다. 주류와 함께 연말 홈파티 필수품인 밀키트와 간편 조리식도 NH농협카드와 삼성카드 등 행사카드 구매 시 30% 할인해 준다.
늦게까지 이어지는 모임도 줄고 있다. 택시비 인상 등으로 대중교통 막차 전에는 헤어질 계획이란 이들도 나온다. 인천에 사는 최민지(25)씨는 "택시비가 예전 같지 않다. 10분 정도 걸리는 곳이라도 야간 할증이 붙으면 1만원 가까이 나온다. 최대한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 시간 안에 집에 가거나, 집에서 만나 1박으로 놀고자 한다"고 말했다.
◆대규모 모임 줄었지만…설렘·온기 여전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이전만큼 찾아볼 수 없지만 연말에 대한 기대는 여전하다. 트렌드모니터 조사 결과 '연말이 되면 설레는 기분이 든다'는 응답은 45.0%로 2022년(43.4%)보다 소폭 증가했다. '12월은 즐겁고 재미있는 달'이란 답변도 같은 시기 34.0%에서 38.9%로 늘었다. 특히 저연령층에서 연말이 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따뜻함' '설렘' '특별함' 등의 감정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연말 분위기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만큼 이들 사이에선 이를 제대로 즐기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표적으로 트렌드를 주도하는 Z세대(1990년대 중반 이후 출생)를 중심으로 연말에 대한 설렘이 '놀이 문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최근 기업 사내에선 '매니토' 놀이가 확산하고 있다. 매니토는 '비밀친구'라는 뜻으로 제비뽑기로 선정된 상대방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편지나 선물, 선행 등을 제공하는 놀이다. 직장인 장경호(46)씨는 "최근 막내 직원의 제안으로 부서 내에서 '매니토' 놀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환경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연말에도 지속가능한 소비를 실천하려는 이들도 나온다. 배달음식보다는 직접 요리해 먹기, 일회성 장식 구매나 과소비는 줄이기 등 각자의 여력에 맞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박선영씨는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고 있는데, 최근 연말을 어떻게 보낼지 대화했다. 일회용품, 잔반 남기기 지양 등 연말에도 가능한 선에서 환경을 위한 실천을 하기로 했다"고 했다.
이런 연말 풍경 변화에 대해 허창덕 영남대 교수(사회학과)는 세 가지 원인을 들어 풀이했다. 경제적 요인, 사회문화적 지형, 이에 따른 사회관계망이 변화해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고물가와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팬데믹 이후 사회·문화적 지형이 변화함에 따라 사회관계망이 축소됐다. 이전에는 심리적으로 먼 거리의 지인들과도 쉽게 만남을 가졌다면, 현재는 가족, 절친 등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더욱 중시되고 있다. 집에서 휴식을 즐기거나 가족 모임을 즐기려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조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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