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낸 구상 시인.<영남일보 DB> |
시인 구상은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문인이기 전에 강직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광기와 잔인함으로 뒤덮인 전쟁속에서도 기자로서 양심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권력이 옥죄고 탄압해도 그의 필봉은 꺾이지 않았다.
1942년 북선매일신문사에서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시인 구상은 이후 부인신보와 연합신문을 거쳤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의 주간을 맡아 긴박한 전황을 전했다. 때로는 전선으로 종군해 시대의 참상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승리일보 주간으로 있던 그가 1·4후퇴 후 피란 보따리를 푼 곳이 바로 영남일보였다. 생전에 그가 쓴 '영남일보 50년사(史) 기고문'에는 영남일보와 인연을 맺게 된 정황이 상세하게 나온다.
"(내가 주간으로 있었던) 승리일보는 영남일보의 호의로 그 시설과 사무실을 함께 쓰게 되었는데, 나는 당시 김영보 사장 옆자리에서 집무를 하는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중략) 내가 영남일보에 신세를 지게 되면서 (승리일보의) 고문이었던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 역시 신문사의 호의로 뒷문 입구 전화교환실을 옮기고 거기에 책상을 놓아 드렸는데 그 방이 피란 문인뿐 아니라 범문화인 족속들의 사랑방이 되었던 것이다."
◆전쟁 당시 영남일보 칼럼서 정론직필
1947년쯤 구상 시인과 부인 서영옥 여사, 딸 자명씨. 구상 시인은 휴전 협정이 있었던 1953년 대구에서 가까운 칠곡 왜관에 집을 마련해 정착했고, 의사였던 그의 부인은 칠곡에서 '순심의원'을 운영했다. 대구문학관 제공 |
영남일보의 사무실을 빌려 승리일보를 제작해 가던 구상은 틈틈이 자신의 글을 영남일보에 실었다. 특히 사회시평 형식의 칼럼을 수시로 게재했다. '고현잡화(考現雜話)' '각설일필(却說一筆)' '역외춘추(域外春秋)'라는 타이틀을 단 칼럼은 시대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영남일보 1952년 4월28일자 고현잡화 코너에 쓴 '낙동강까지 또 와야'라는 글은 아직도 명문으로 남아있다. 당시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후방이던 대구는 전쟁에 대한 집단적 불감증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구상은 칼럼을 통해 전쟁에 무감각해져 가는 정부와 각계각층의 행태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했다.
(전략) "전시국민선전대책(戰時國民宣傳對策)에 행정부나 국회나 사회 각 기관은 무심하다. 거리에는 정훈국(政訓局)이 대민공작(對民工作)을 철수한 후로는 전쟁 수행에 대한 벽보 하나 안 내붙는다. 가두(街頭)에는 범람하는 외국영화의 간판과 선거벽단(選擧壁單)만이 춤을 춘다. (중략) 이 해이(解弛)하고 분체(分體)된 국민조직을 재편(再編)하고 민심을 전쟁에 응집(凝集)시키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고 자유고 정치고 머지않아 붉은 개가 다 물어 갈 것이요, 이 땅 백성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모조리 터지는 격이 될 것이다. 정말 낙동강안(洛東江岸)에 공산군 포성이 가까이 와야 비전국민(非戰國民)에서 결전국민(決戰國民)이 되려는가."
구상은 또 전쟁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라를 위해 묵묵히 힘쓸 인재가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권력과 명예, 부(富)를 얻어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보다는 나라의 반석이 될 참다운 재목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한 인재를 '뿌리'에 비유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할 은사(隱士)의 출현을 간절히 원했다. 영남일보 1952년 4월18일자 고현잡화 코너에 쓴 '조국의 뿌리'라는 칼럼에는 구상의 그러한 '희망'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전략) "뿌리는 줄기의 위엄과 권력이나, 잎새의 무성한 재부(財富)나, 꽃의 영화나, 열매의 공명(功名)을 소욕(所欲)도 소망도 않고 오직 지하에서 묵묵히 천혜의 자양(滋養)을 자력(自力)으로 흡수하여 토양이 우량한 곳을 골라 자기 생명을 확충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중략) 이제 우리는 대민민국이라는 나무를 연상하여 보자.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 무궁화는 줄기될 자, 잎새될 자, 꽃될 자, 열매될 자, 아니 이를 허욕(虛慾)하는 자는 하도 많으나 뿌리될 자, 뿌리 되려는 자는 어찌 이다지도 적단 말인가! (중략) 자기를 지하에 숨겨, 뿌리가 되어, 오늘 목전의 현실을 불만불평하고 이를 시비하고 저주하기보다, 시간의 자연 도야(陶冶)를 기다리며 오직 대한민국의 참다운 생명만을 확충하려는 은사(隱士)들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중략) 이 길만이 승리에의 길이며 진정한 애국애족의 길이기도 하다. 뿌리가 되자! 조국의 뿌리가 되자! 다 잃어도 조국의 운명은 항시 너와 한가지로 있을 것이다."
구상은 1953년 영남일보에 실은 칼럼을 중심으로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을 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내용이 담겼다는 이유로 '민주고발'은 판매금지되고 말았다. 이 일로 그는 반공법 위반죄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반년여에 걸친 옥살이를 하다 무죄로 풀려났다.
◆휴전 후 영남일보 주필·편집국장에
영남일보 1952년 4월28일자에 실린 구상 시인의 칼럼 '낙동강까지 또 와야'. 이 칼럼을 통해 전쟁에 무감각해져 가는 정부와 각계각층의 행태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했다.영남일보 DB |
구상 시인은 영남일보 1952년 4월18일자에 '조국의 뿌리'라는 칼럼을 게재하고 전쟁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라를 위해 묵묵히 힘쓸 인재가 시급하다고 역설했다.영남일보 DB |
휴전 후에도 구상과 영남일보의 인연은 계속됐다. 전쟁이 끝나자 민간 신문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군 기관지(승리일보)가 민간언론을 위축하게 한다"는 진정을 낸다. 이 때문에 결국 구상이 주간으로 있던 승리일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언론인 구상의 강직함을 익히 알고 있던 영남일보 전 사원은 1954년 8월 그를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추대한다. 생전에 구상은 '승리일보 주간 시절 빌려 쓰던 사장실 그 책상 그 자리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하면서 구상은 두 가지 신문 제작 방침을 세웠다. 첫째는 독재에 맞서고, 다른 하나는 지역밀착이었다. 그는 영남일보 50년사 기고문에서 "나는 지방지가 공연히 중앙지의 복사판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설도 주로 대구 시정 문제나 시의회 문제 등을 많이 다뤘고, 노사쟁의도 일찍이 노동자 편이 되어 개입했다. 그래서 영남일보는 한국 굴지의 신문으로서 저 6·25동란 시초서부터 휴전 후 제2차 수복 때까지 대한민국 판도 내에서 가장 발행부수도 많고 그 권위도 평가되던 신문이었다"고 회상했다.
무엇보다 구상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이 때문에 기관원이 권총을 쏘며 그의 집에 난입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이 그 독재성을 노골화하니 이에 반대하여 자유민주주의 수호투쟁을 벌였다. 그래서 나는 신문사가 경영상 너무 적극적인 비판을 공적으로 가히기 어렵다고 여겨질 때에는 개인적 서명을 하고 신랄한 논평을 퍼부어 댔다. 이래서 영남일보는 정치적 계엄령이 펴 있는 부산에서 여러 차례 압수를 당하는 곤경을 치렀으며, 경영진에도 중압을 가해왔을 뿐 아니라, 나에게는 집에까지 기관원이 권총을 쏘며 난입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때는 속칭 한민당 기관지라 불리던 동아일보도 아직 저렇듯 비판적 자세에 이르지 못한 때로서 영남일보가 반독재투쟁의 선편을 갔었다고나 하겠다"-영남일보 50년사 기고문 중-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낸 이후에는 경향신문 논설위원 겸 도쿄지국장(1961~65)을 역임했다. 장면 총리를 비롯해 5·16 직후 박정희 정권 등의 정계 입문 권유도 끊이지 않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시인 구상' '기자 구상'은 그의 시 제목처럼 '홀로와 더불어' '영원 속의 오늘'을 살다가 '오늘 속의 영원'으로 우리곁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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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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