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 |
지난주 목요일인 9일 미국 증시가 휴장했다. 모처럼 미국 증시 동향을 체크해보려 했는데 무척 의아했다. 평일인 데다 정기공휴일도 아니었다. 그 이유를 다음 날에서야 뉴스를 보고 알았다. 바로 미국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국장(國葬)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금융의 메카인 미국 뉴욕증시가 평일에 임시 휴장을 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하지만 미국 증시는 1865년 4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피살된 것을 계기로 대통령의 국가장례식이 있는 날에 휴장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중도 퇴진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장례식 때도 예외는 없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향년 100세로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워싱턴의 국립대성당에서 열린 영결식 당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했다. 미국 연방정부기관과 금융기관 등은 문을 닫거나 단축 운영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린 마틴 대표는 "휴장으로 카터 전 대통령의 조국에 대한 헌신을 기릴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거래소 건물 상공에는 조기가 게양됐다. 태평양 건너 서울 종로구의 주한미국대사관에도 조기가 걸렸다.
사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당선된 민주당 출신 지미 카터는 역대 최악의 대통령으로 불렸다. 2차대전 이후 최초로 재선에 출마했다 낙선한 현직 대통령이었다. 재임 도중 경제지표는 악화됐고, 스태그플레이션이란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임기 말 이란 내 미국대사관에 억류된 인질들을 구출하려다 실패한 참사는 그의 지지율을 폭락시켰다. 1980년 11월 치러진 대선에서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에게 50개주(州) 가운데 44개 주에서 대패했다.
지미 카터는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었다. 인권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박정희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다. 1979년 방한 때는 영부인 역할을 대신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안방외교'가 빛을 발했다고 미(美) 국무부는 기록하고 있다.
지난 9일 성대하게 거행된 카터 대통령의 영결식에는 생존해 있는 전·현직 대통령 5명과 그 부인들이 모두 모였다. 선거 때마다 으르렁거렸던 트럼프와 오바마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뉴욕타임스(NYT)는 "격렬한 갈등을 벌이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휴전하는 화합의 순간이었다"며 "살아있는 미국 정치인이 못하는 '화합'을 죽은 카터가 이뤄냈다"고 썼다.
이날 장례식은 시종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는, 한편의 정치적 축제였다. 거대한 미국의 품격과 저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미국 같으면 국부(國父)로 불렸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망명 도중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로 쫓겨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암살됐고, 전두환·노태우·이명박 대통령은 영어(囹圄)의 몸이 됐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돼 전직 대통령이 누려야 할 예우도 받지 못하고 있다. 고향에 설립된 동대구역 앞 박정희 대통령 동상은 편할 날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 자폭(自爆)으로 탄핵소추됐다. 심지어 내란죄 혐의로 체포돼 끌려나갈 처지다. 카터의 장례식처럼 전 세계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말이다.
미 국무부의 한 관리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태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한국은 원래 그런 나라"라고 답했다 한다. 대통령이 강할 때는 칭송하고 굴종하다가, 약하거나 퇴임하면 가차 없이 물어뜯는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인 것인가.
강효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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