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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
장뤽 고다르의 영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세 가지 것들'에서 주인공 줄리엣은 말한다. "언어는 인간이 거주하는 집이다." 그리고 30년 후, 'JLG/JLG-고다르의 자화상'에서 고다르는 이 언어적 성찰을 이어간다. 이렇듯 그가 말하는 언어는 그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며, 인간의 사고와 존재를 담는 집이다. 문제는 우리가 언어로 세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그 울안에 갇힌다는 사실.
고다르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 또한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 언어가 차고 넘치면서 그 본질은 점점 희미해진다. 언어가 도구로 치닫고 가벼워질수록, 우리는 스스로 살아가는 본래의 집을 허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TV를 켜는 일이 줄어들었다. 홈쇼핑에서는 과장된 감탄사가 넘쳐나고, 뉴스에서는 정치인들이 손바닥 뒤집듯 공약을 바꾸며 영혼 없는 말을 쏟아낸다. 계엄이 계몽이 되고, 지렁이 같은 낙서를 두고 형이상학적 해석을 펼치며 논쟁이 벌어진다. 오직 순간을 위한 '인공언어(M. 피카르트)'만이 들릴 뿐이다.
세르비아 출신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The Artist Is Present'라는 작품에서 75일 동안 하루 7시간씩 관객과 마주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빛만으로 소통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녀는 말 대신 침묵과 시선만으로도 깊은 감정을 나눌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많은 관객은 함께 울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지만, 정작 진정한 소통은 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이 시대의 언어는 과연 우리를 연결하는가, 아니면 더 고립시키는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마주한 반가사유상은 이러한 언어의 소음과 대비되는 침묵의 상징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 편안하게 기울어진 머리와 손가락을 뺨에 대고 있는 자세는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지닌 의미를 강조하는 듯했다.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들을 침묵 속에서 담아내고, 그 고요 속에서 오히려 더욱 깊은 대화를 나누는 듯한 형상이었다. 끊임없이 말하지만 사유와 침묵의 순간은 사라지고 있는 지금, 반가사유의 침묵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 사유하는 능력을 새삼 일깨운다.
사유하는 만큼 말을 하면 어떨까. 종은 스스로 아파하는 만큼 멀리 퍼지게 마련이다. 종소리를 들으며 사유의 숲길을 거닐었던 하이데거의 영혼은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가. 숲은 자연이고, 길은 인간 마음의 행로이다. 철학과 예술은 존재의 숨은 진리를 드러내고, 시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언어의 집을 짓고 허문다. 언어는 사랑을 고백하는 동시에 상처를 남긴다. 문명의 빛과 그림자로서 언어는 우리를 속박하면서도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매일 저녁, 하루 동안 쏟아놓은 말들을 돌아보면 대부분 후회한다. 즉흥적으로, 가볍게 내뱉은 말들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언어는 도구이면서도 목적이고 책무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담는 그릇이며, 존재를 에워싸는 담장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섣불리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존재의 집인 언어를 허물지 않기 위해서는, 더 깊이 사유하고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려 깊은 말들은 우리를 좀더 오래, 좀더 견고하게 지켜줄 것이다. 말보다 침묵이 더 깊은 소통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반가사유의 미소처럼, 언어를 넘어선 침묵 속에서 비롯되는 향유의 시간, 성찰의 시간이 아닐까.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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