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편' 아니면 반감부터
불신 넘어 혐오 대상에
정서적 양극화의 결과
포장지로 맛 달라지듯
포장지 떼고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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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혜 경제팀장 |
얼마 전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유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다. 나는 A우유의 맛이 특별하다고 확신했고, 지인은 다른 우유와 차이가 거의 없다고 맞섰다. 급기야 눈을 감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다. 평소 알던 그 맛을 찾으려 온 신경을 혀에 집중했다. 결과는 한 번은 맞고 한 번은 틀렸다. 두 개 중 하나를 찾는 50% 성공 확률에서 한 번은 맞고 한 번은 틀렸으니 사실상 맛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거다.
1970년대 미국 펩시사에서 진행한 '펩시 챌린지'는 제품 포장지에 따라 우리가 어떤 인식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블라인드 테스트다. 콜라 후발주자 펩시는 경쟁사와 자사 제품을 고객의 눈을 가린 후 시음하도록 했다. 펩시콜라의 맛이 뛰어나다고 응답한 사람이 51%, 코카콜라를 선택한 사람이 44%로 나타났다. 하지만 참가자들에게 두 제품의 브랜드를 보여주고 난 다음 시음한 결과는 정반대였다.
최근 OTT 요리 예능에서 심사위원들은 도전자의 음식을 눈을 가린 채 블라인드 테스트로 결정했다. 누가 만든 음식인지를 모르고, 화려한 플레이팅에서 오는 눈속임까지 배제해야 진짜 실력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 감고 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에서 촉발된 사회 갈등이 탄핵 정국 내내 대한민국을 둘로 쪼개버렸다. 정치·사회영역에서의 극단적 양극화를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향한 시선은 비판을 넘어 비난과 혐오의 수준에 이르렀다. 탄핵 찬성과 반대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거리집회와 상대 진영을 향하는 도 넘은 비난과 혐오를 보고 있다. 보수와 진보로 나뉜 정치 양극화의 고리가 더 깊어진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서 블라인드 테스트를 생각했다.
진영과 이념이 양극화된 결과로 보이지만 사실상 각자 추구하는 정책과 메시지, 이념의 간극은 오히려 좁혀지고 있다. 야당 유력 대선주자는 연일 '성장'과 '실용'을 강조하며 중도 보수를 공략 중이고, 여권에서는 노동 친화적 행보를 보이며 중도진보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거대 양당체제에서 우리 정치는 우클릭 좌클릭의 이름으로 중도층을 공략해왔다. '표'를 의식한 의도적 메시지나 정책이라 할지라도 방향은 비슷하다. 하지만 양 진영을 지지하는 세력의 간극은 더 벌어졌으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소속된 집단에 대해서는 강한 호감과 신뢰, 그렇지 않은 집단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반감과 불신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는 '정서적 양극화'. 지금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용어다.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외집단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여기는 시선도 있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내편에 대한 관용과 남의 편에 대한 적개심이 본성으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다른 게 아니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눈과 귀는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것을 뇌가 해석해서 가상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서 차이가 발생한다.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단단한 두개골에 싸인 뇌는 한 번도 진짜 세상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까지 했다. 각자 다른 세상을 보고 있지만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정확히 표현할 언어가 없기 때문에 대충 그런 것으로 여기고 맞춰서 사는 것이다.
마치 펩시와 코카콜라 포장지에 따라 맛을 다르게 인식하듯, 보수와 진보로 포장된 테두리만으로 비난을 쏟아내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대목이다. 콜라가 아니라 정치에서 '블라인드 테스트'가 필요한 시대이지 않나.
윤정혜 경제팀장

윤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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