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노우〈수필가·시인·대구문인협회 수석부회장〉 |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파도에 떠밀리는 배같이 바쁜 일상에 쫓기며 산다. 일가친척이 가까이 있어도 아는 체하기 쉽지 않다. 이제 멀리서 사는 형제는 이웃보다 못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막말로 누가 죽어야 장례식장에서 혈육을 만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네 형제 부부가 언젠가부터 날을 정해서 혈육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농사짓는 큰형님이 모내기를 끝냈을 때나 가을 추수 다 했을 때 애쓰셨다고. 좋은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을 당한 형제가 있을 때 네 형제 부부가 식사하며 축하하거나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번에는 우리 네 형제 부부 외에 두 분 고모님을 모시자는 큰형님의 제안이다. 고모님이 여섯 분이신데, 네 분은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다. 대구에 사는 아흔셋 둘째 고모님과 시골에 사는 일흔여덟 막내 고모님만 남았다. 가뭄에 단비를 만난 양, 비 오는 날에 두 분 고모님과 조카 네 형제 부부가 만났다.
식사가 끝날 즈음에 둘째 고모님이 가방 속을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서 큰형님에게 슬쩍 내민다. 옆에 앉아 있던 막내 고모님도 뒤질세라 봉투를 건넨다. "이게 뭡니까."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이걸로 밥값에 보태거라."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오랜만에 두 고모님을 모셨는데, 넣어 두세요." "우리 형제, 고모님에게 밥 대접할 형편은 다 됩니다." 큰형님이 단호하게 말하며, 엉겁결에 받은 봉투를 억지로 고모님들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오늘 계산은 제가 합니다, 분위기를 눙치며, 두 분 고모님은 꽃을 너무 좋아하시지요, 예쁜 꽃바구니에 심은 공기정화식물을 드렸다. 작은형님은 과일을, 막내는 포장한 떡을 선물한다. '살다가 이런 좋은 날도 있구나.'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세월이 소환되는가 보다, 두 분 고모님 눈에 눈물이 그렁하다. 진즉 마음을 읽고 찾아서 안아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내가 양로원에 봉사 갈 시간이 되어 고모님을 안아드리며, '다음에 큰집 작은집 사촌 부부들과도 만남을 계획하고 있으니 그때 또 모시러 가겠습니다' 하고 각자 차에 오른다. 식당 사장이 '잠깐만요' 하며 썼던 우산도 내 던지고 무얼 잔뜩 무겁게 들고 쫓아온다. "옛날에는 먼 길을 발로 걸어서 어른을 찾아뵈었지만, 지금은 자동차를 타고도 어른을 찾아볼 줄 모르는 세상이지요. 혈육이라도 바쁘게 사느라 남같이 지내는데, 고모님을 살갑게 모시는 모습이 정말 귀감이 된다"시며 직접 재배한 양파를 집집마다 한 꾸러미씩 선물로 주신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올려다본 비 그친 하늘이 참, 맑고 푸르다.
신노우〈수필가·시인·대구문인협회 수석부회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