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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1〉 호국도시 포항, 국토 수호의 역사

2025-04-03

삼국시대부터 왜구에 맞서 동해 방어…군사적 요충지이자 호국의 땅

5~6세기부터 외세 침입 많았던 영일만, 곳곳에 성 쌓아 해안 방어선 구축

청하읍성, 해적 방비 위해 축성…장기읍성은 세종때 군사기지로 활용

전초기지였던 읍성, 일제강점기에 소실됐다가 최근 고현성·흥해읍성 복원

[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1〉 호국도시 포항, 국토 수호의 역사
포항 장기읍성. 세종 때인 1439년 돌로 다시 쌓고 동해안의 주요 군사기지 및 관아로 사용했다. 성벽은 동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를 타고 유려하게 흐르는데 지금도 성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포항 영일만은 동해안에서 최고로 큰 만이다. 이는 항구가 발달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이 된다. 항구는 바다로, 세계로 진출하는 교두보이지만 반대로 외세가 침략해 들어오기 좋은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때문에 포항은 삼국시대부터 왜적은 물론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항하는 국방(國防)의 전략적 거점이었고, 임진왜란과 한말(韓末) 수많은 의병들이 활동한 호국(護國)의 땅이었다. '항구의 길목'이라는 뜻의 '포항(浦項)'은 호국국방도시로서 역사의 고비마다 시대적 과제를 극복해온 국토수호의 전 역사를 함의한다.

◆ 일천년 해안 방어(海防)의 요충지

포항지역은 삼한시대 진한 12소국 중 하나인 '근기국'이 현재 포항의 연일, 오천, 대송 등지에서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비정된다. 이들은 진한 연맹체의 일원으로서 토착적인 세력기반을 유지한 채 3세기 무렵까지 독자적인 성장을 지속하다 이후 세력확장에 나선 신라에 흡수된다. 신라에 편입된 포항은 금성과 인접한데다 바다를 끼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 크게 중시됐다. 바다로 쳐들어오는 왜적은 큰 골칫거리였고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펼치던 5세기에는 그 중요성이 더 컸다.

신라시대 왜구의 침입기록을 보면 혁거세왕 8년(BC 50년)부터 소지왕 22년(500년)까지 25차례에 이른다. 418년에는 고구려와 말갈 세력이 흥해까지 침입해 수도인 경주를 위협하기도 했다. 이에 신라는 5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주요 국경지역에 성을 쌓아 방비했다. 특히 해안에 산성을 쌓고 이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수도와 인접한 포항은 보다 각별한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특히 흥해 지역은 왜가 영일만에 상륙하여 경주로 침입하는 노선상에 있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해로를 통해 신라의 세력권이었던 강릉과 삼척 지역을 연결해주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런 배경 아래 504년 남미질부성과 북미질부성이 축조되었다.

경주의 동쪽 외곽지대인 장기면은 일본에서 곧바로 흘러오는 해류를 안고 있는 탓에 늘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다. 장기면의 방비가 뚫리면 수도 서라벌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장기면에는 5~6세기부터 다량의 성곽이 축성되기 시작했다. 장기 구(舊)읍성과 배후의 시령산성, 만리산성 등이 이 시절에 세워진 것들이다.

영일만과 냉천 변의 넓은 들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에는 고현성이 있었다. 근기국의 치소로 비정되는 토성이다. 운제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인덕산 줄기 끝 지점으로 남구와 연일읍, 오천읍, 대송면 등 영일현의 주요 지역이 한눈에 조망되어 고대 해안으로 침투하는 적을 감시하기 쉬운 위치다.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내내 왜구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던 영일만 지역에서 고현성은 방어에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고 나아가 많은 인구가 거주할 수 있는 성이었다.

바닷길을 통한 외세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고려 초에는 동여진이, 이후에는 왜구들이 들끓었다. 그들의 선단은 해류를 타고 남쪽 해안가로 접근해 바다에서 상륙하거나 하천 또는 강을 타고 침입했다. '고려사절요'에는 현종 2년인 1011년 8월 흥해, 청하, 영일, 장기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종 3년인 1012년에는 청하와 영일 등지에 침입한 동여진을 격퇴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고려 말엽 우리나라 해안은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렸다. 충정왕 2년인 1350년의 침입을 기점으로 점점 그 규모와 빈도가 높아졌는데, 이후 고려 말까지의 42년 동안 506회, 연평균 12회 정도의 왜구 침입 기록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왜구의 침입이 가장 많았던 우왕(1374∼1388년)대에는 378회에 이른다. 당시 포항은 동해안에서 가장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으나,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황폐해졌다. 지역 백성들이 겪었던 수난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고 터전을 두고 떠나는 백성도 많아졌다.

왜의 행패가 날로 극심해지자 고려 우왕 13년인 1387년에는 흥해 통양포(현 포항시 북구 두호동)에 수군만호진을 설치했다. 병선과 수군이 배치되자 뿔뿔이 흩어졌던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1389년과 1390년 경 흥해읍성이 성 주변에 해자를 두르고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영일읍성도 고현성에서 장흥리로 이전 완공되어 백성들은 안주하게 되었다. 고려 때부터 국방기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영일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대목이다.

[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1〉 호국도시 포항, 국토 수호의 역사
포항 흥해읍성은 2023년 일부가 복원돼 '흥해읍성테마로'로 되살아났다. 성벽 안쪽에는 흥해읍성의 동헌인 제남헌이 영일민속박물관으로 서 있다.
◆ 왜구에 맞선 동해안의 전초기지

왜구의 침입과 그로 인한 피해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속된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의 근심이 왜구만 한 것이 없다"라 할 정도였다.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을 충분히 경험한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체계적인 방비에 나섰다. 포항은 흥해군, 청하면, 영일현, 장기현 등 1군 3현으로 정비되었다. 군사동원체제는 태종 17년인 1417년 육군으로 영일진이 설치되어 흥해, 영일, 장기가 예속되었고 해군으로는 흥해 통양포만호가 존속되는 한편 1460년 장기에 포이포(현 모포지역)만호가 설치되었다. 또한 조선 세종 때에는 고려시대부터 해안에 자리한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게 된다.

청하읍성은 조선 세종 9년인 1427년에 청하현감 민인이 석성으로 쌓았다고 한다. 청하는 해안과 불과 3㎞의 가까운 고을로 주변 너른 평야는 기름진 곡창지대였다. 청하읍성은 당시 해안가 위주로 약탈이 심했던 해적을 방비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장기읍성은 세종 때인 1439년 돌로 다시 쌓고 동해안의 주요 군사기지 및 관아로 사용했다. 단종, 예종, 중종 때 각각 기록된 장기읍성의 상세 규모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 직전에 부하를 승려로 위장시켜 장기면의 방어 태세를 면밀히 살피게 한 기록은 장기의 중요성을 증거 한다. 장기현은 조선 말기 고종 때 장기군이 되어 감포, 양남, 양북면을 흡수한다. 이 때 군수의 지휘 아래 좌수와 별감 2인의 관원을 두었고 군병은 수군 420인을 포함하여 총 2천889인에 이른다.

영일읍성은 세종 21년인 1439년에 장흥리 고읍성에서 남성리 읍성으로 다시 이전해 300여 년간 그 자리를 지킨다. 이후 영조 23년인 1747년 다시 장흥리로, 1988년 연일읍 생지리로, 1871년 남구 대잠동으로, 1886년 다시 생지리로 이전했다. 영일만의 중심이었던 영일현 읍성의 잦은 이동은 서양 열강의 침략 위협이 극에 달했던 시대상황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포항의 읍성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거의 소실됐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당시 조선총독부의 1호 법령이 읍성 철거령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이었으나 실상은 국방의 거점을 무너뜨리고 조선의 통치권을 지우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의병들이 무너진 성터 위로 봉기하였으니 결국 호국의 구심점은 파괴하지 못했다.

광복 이후 포항은 한국전쟁 낙동강 방어의 최전선으로, 가장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격전지로, 해병대 군사기지 터전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호국국방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고현성은 2020년부터 발굴 작업을 진행해 2023년 정비를 마치고 둘레길로 시민에 공개됐다. 흥해읍성은 2023년 일부가 복원돼 '흥해읍성테마로'로 되살아났다. 성벽 안쪽에는 흥해읍성의 동헌인 제남헌이 영일민속박물관으로 서 있다. 포항시는 향후 흥해읍성 전 구간과 남, 북문 복원을 추진할 방침이다. 청하읍성 객사 터에는 청하초등학교가, 관아 터에는 청하면행정복지센터가 자리한다. 센터 입구에서 겸재 정선이 청하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그린 '청하읍성도'를 볼 수 있는데, 그림을 지도삼아 청하면소재지를 걷다 보면 일부 남은 성벽과 민가에 스며들어 있는 성 돌을 찾을 수 있다. 행정복지센터 마당에 서 있는 수령 약 350년인 회화나무는 겸재의 그림 속 옛 나무라 전해진다. 복원되어 옛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장기읍성이다. 성벽은 동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를 타고 유려하게 흐르는데 지금도 성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 향교가 남아 있고 동헌은 산 아래 면사무소로 이전해 보호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진산(鎭山)은 거산(巨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거산은 동악산이고 진산은 '고을을 지켜준다'는 뜻이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포항시사, 지리적 시선으로 본 포항의 읍성, 포항문화유적 분포지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세종실록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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