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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의로 일어나다 (하) 산남의진과 장기의진

2025-10-13

고종 밀지 받고 일어난 산남의진 본부 부서장 17명 중 7명이 포항 출신

산남의진 최대 규모 영남 의변진

1907년 이른 봄 기병해 일군 연파

9월에 죽장 입암에서 접전끝 패배

정용기 대장 등 의변 40여명 순국

130여 차례 항전…700여명 사상

1910년 고와실전투 끝으로 해체

 


포항 산남의병 전투지. 1907년 9월 산남의진이 일본군을 맞아 전투를 벌인 곳이다. 산남의진은 활동 기간동안 130여 차례의 항전을 치르고, 700여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영남권 의병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포항 산남의병 전투지. 1907년 9월 산남의진이 일본군을 맞아 전투를 벌인 곳이다. 산남의진은 활동 기간동안 130여 차례의 항전을 치르고, 700여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영남권 의병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여기에는 유명한 한국 호랑이 사냥꾼들이 많이 살았다. 이들은 '의병'이라는 칭호로 뭉쳤다.' 1906년 한국에 들어온 영국인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는 이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의병'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는 아름다운 들판과 선량한 사람들을 보았고, 철저하게 파괴된 땅과 불길과 총검에 쓰러진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무명의 의병'을 만난 그는 이렇게 썼다. '결과가 뻔한, 가망이 없는 싸움을 벌여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이들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그러나 내 오른편에 서 있는 의병 분대장의 빛나는 눈과 미소를 보았을 때 가엽다는 생각은 곧바로 사라져 버렸다. 가엽다니! 내 생각이 잘못된 것 같다. 비록 그 표현 방식이 잘못됐다 할지라도 그들은 적어도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 의로 일어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 일제의 침략행위는 한층 강화됐다.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도 모자라 친일정권을 수립하고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였고, 일제는 이를 주도한 명성황후를 시해하기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이다. 일제는 곧바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단발령과 복제개편 등이 포함된 을미개혁을 시행했다. 이는 조선 민중의 배일감정에 불을 지폈다. 분노한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켰고, 갑오 농민항쟁 이후 흩어져 칩거하던 동학군 잔여세력도 힘을 더했다.


포항에서도 창의가 잇따랐다. 대표적인 인물은 흥해 출신의 최세윤이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소모장으로 활약한바 있으며 을미사변 이후에는 동향의 장상홍, 정래의, 이우정 등과 함께 의병 400여 명을 규합하여 김도화가 이끄는 안동의진에 합류했다. 그는 아장(亞將·안동의진 좌익장)의 직책을 맡아 군세를 크게 떨쳤으며, 1896년 고종의 권고에 따라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한 무렵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같은 해 5월에는 정래의 등과 함께 동해안 일대에서 계속 항쟁하는 김도현 진영에 합세해 힘을 보탰다.


1896년 단오절에는 기계 인비(仁庇)에서 연합 의진의 성격을 띤 '경주의진'이 결성됐다. 경주도소모장 이채구는 신광, 참모장 이준구와 이종흡은 기계, 참모장 장상홍과 이우정은 흥해 출신이었고 그 외 죽장, 안강, 강동 출신 의사도 다수 포함됐다. 흥해에서는 연일 출신인 신태주가 기병했다. 청하에서는 김진규, 이순창, 이창모, 이도상, 이기철 등이 함께 거의했다. 이하정과 김송몽, 정천녀, 서초간, 김인수도 흥해에서 거병하였고, 윤면익이 죽장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등 영일만 일대는 그야말로 의병의 행렬로 가득했다.


포항 장헌문의병장, 엄동주선생 추모비.  장헌문 의병은 1906년 5월, 포항 장기에 장기의진을 결성하고 게릴라전을 펼치며 큰 활약을 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포항 장헌문의병장, 엄동주선생 추모비. 장헌문 의병은 1906년 5월, 포항 장기에 장기의진을 결성하고 게릴라전을 펼치며 큰 활약을 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장기의진 장헌문 등 300여명 결집

열일 중심으로 경주 등지서 활동

수비대 습격 등 활발한 게릴라전

투쟁 공훈 인정받은 인물만 36명

◆ 영남의 대표 의병부대 산남의진과 장기의진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한다. 이어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대신을 협박해 외교권을 빼앗았다. 1905년의 을사늑약이다. 기개 있는 선비와 우국지사들은 분함과 억울함을 참지 못해 다투어 의병을 조직했고 더러는 자결하기도 했다. 고종황제는 전 도찰사 정환직을 불러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대는 화천지수(和泉之水)를 아시는가?" 그리고는 '짐망(朕望·짐은 바란다)'이라 적은 밀지를 내렸다. '화천의 물'이란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를 일컫는 것으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데 힘써 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짐망'이라는 두 글자에 담겨있었다.


황제의 밀지를 받들어 정환직과 그의 아들 정용기, 죽장의 이한구, 흥해의 최세윤 등 4인이 함께 방략을 논의하고 거의의 날을 약속한 뒤 준비를 서둘렀다. 동지를 모아 각처의 선비와 유림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니 순식간에 3천여 명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1906년 2월, 정용기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군호를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하였다. 산남은 조령 이남의 영남지방을 이른다.


의진의 발원은 영천이었으나 본부의 부서장 17명 중 중군장 이한구(죽장), 소모장 정순기(흥해), 도총장 이종곤(기계), 도포장 백남신(죽장), 좌익장 정치우(오천), 우익장 정래의(흥해), 장영수위 최기보(죽장) 등 7명이 포항 출신이었다. 당시 포항권에서는 흥해의 최세윤, 정래의, 조성목, 김창수, 청하의 이규상, 오수희, 김찬묵, 김상규, 기계의 이종곤, 김태환, 김학이, 죽장의 안수원, 임병호, 김순도, 영일장기의 김인호, 박경화 등이 지역 책임자로 활동했다. 산남의진은 활동 기간동안 130여 차례의 항전을 치르고, 700여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영남권 의병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1906년 5월, 포항 장기에서도 장헌문을 중심으로 김재홍, 김종호, 김복선, 이태이, 정만춘, 최봉학, 이무범, 최용이, 장치일 등이 함께 주민 300여명을 모아 의진을 결성했다. 장기의진은 영일군을 중심으로 경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는데 일본 수비대를 습격하거나 수송품을 노획하는 등의 게릴라전을 펼치며 큰 활약을 했다. 또한 산남의진과 정보를 교환하고 연합작전을 구사하는 등 긴밀한 공조를 벌였다. 실제 1908년 1월 양 의진이 합동으로 장기 순사주재소를 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포항 장기충효관.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포항 장기충효관.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통곡의 입암지변


산남의진의 기본계획은 동해안을 따라 강릉으로 북상하는 것이었다. 도중에 이미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던 영덕의 신돌석의진과 합세하기로 하였고, 정환직은 서울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무기를 마련해 강릉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강릉에 운집한 의병이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돌진하면 경기 지방의 의병이 호응하여 끝내는 서울의 적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산남의진은 1907년 이른 봄에 기병하여 단숨에 청하를 습격하고 신성 자양검단에서 일군 수비대를 연파했으나, 9월1일 죽장 입암에서 매복해 있던 일본군과 접전 끝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정용기 대장을 비롯하여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 도합 40여명의 의병이 일시에 순국하는 비운을 당했다. 이 날의 전투를 '산남의진 입암지변'이라 한다. 양민 수십 명이 학살되었고 수십 동의 민가도 소실되었다. 죽장에는 이날을 전후로 제사가 많다.


산남의진은 서둘러 정환직을 2대 대장으로 추대하고 또 한 번의 비장한 출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환직은 적의 형세를 살피기 위해 부하 둘과 함께 청하현에 잠입했다가 1907년 11월 9일 일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15일 영천 옥에 수감되었다가 이튿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부하와 함께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1908년 3월 5일, 산남의진은 제3대 대장으로 최세윤을 추대했다. 정환직의 유언이었다고 전한다. 최세윤은 전체 의병을 4개 부대로 편성하고 게릴라 유격전을 감행, 먼저 밀정과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경상북도 청하, 청송, 의성, 흥해, 영해, 영천 등지에서 크고 작은 전적을 거두었다. 그러다 1908년 7월, 최세윤은 옛 장기 내남면(현 경주시 양북면)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구심력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잔여 의병들이 유격전으로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1910년 고와실전투를 마지막으로 산남의진은 해체되었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했다. 최세윤은 대구로 압송되어 3년에 걸친 고문과 회유를 견뎌내고 1911년 11월 10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8년간의 옥고를 겪다가 1916년 8월 9일, 11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했다. 장헌문은 1908년 5월에 체포되어 1909년 10월 10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동지들을 찾아 구국운동을 계획하였으나, 1926년 1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해방직후인 1946년 2월, 대한광복회는 입암지변이 일어났던 죽장 입암서원 하천변 일대를 찾아 위령제를 올렸다. 현재 '산남의병 전투지'와 입암리 서포항고등학교 뒤편 언덕에 자리한 '산남의진 발상기념비'는 현충시설로 지정되어있다. 흥해 영일민속박물관에는 의병들의 항일정신을 기려 1967년에 세운 '한말 의병 항왜 혈전기념비'가 있다. '애국지사 장헌문의병장 추모비'는 장기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 있으며,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장기의진의 역사는 장기면 마현리에 위치한 장기충효관에 각종 기록물들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항일투쟁에 참가한 공훈을 인정받아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독립장 표창을 받은 포항지역 인물은 36명에 이른다.


글=류헤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포항의 독립운동사, 최세윤의병대장기념사업회. 열린포항. 영남출신독립운동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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