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상고 학생 신분으로 참전
포병으로 죽을 고비 수차례 넘겨
“꿈에 나타난 아버지 덕분에 버텨”

24일 오전 대구 계명대에서 만난 6.25전쟁 참전용사 이동근(95)옹. 이윤호기자 yoonhohi@yeongnam.com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추위가 엄습한 한겨울 벌판에서 손으로 땅을 파고 지푸라기를 덮고 밤새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게 전쟁이었어요."
6·25전쟁 당시 안강·기계전투와 백마고지전투에 국군으로 참전했던 이동근(95) 용사가 취재진에게 조용히 먼저 말을 건넸다.
참혹한 전장의 한복판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그는 당시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 학생 신분이었다. 전장에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그때의 기억을 술회했다.
1950년 6월25일 이 용사는 서울에서 농구대회를 마치고 친구들과 화신백화점을 구경 중이었다. 숙소에 돌아온 그는 곧바로 전쟁 발발 소식을 들었다. 일단 새벽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왔다. 그리곤 학도병 포병 모집 공고를 보고 곧바로 자원입대했다.
"당시 대구상고 3학년이었어요. 포병은 어느 정도 학력이 있어야 지원할 수 있었는데, 자격이 되니 당연히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가야지'하는 일념으로 교복을 입은 채 그대로 훈련소로 갔어요."
참여한 첫 전쟁터는 경북 안강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요충지다. 그는 7사단 18포병대 소속으로 전투에 투입됐다. 주어진 임무는 포탄을 쏘기 위해 거리와 위치를 측정하는 '관측반'이었다. 장교에게 포탄과 물자를 전달하는 일도 맡았다.
"산을 오르내리며 포탄을 나르다가 하늘 위 비행기에게서 기관총 사격을 받았어요. 전우 한 명과 함께 풀밭에 엎드린 채 한참을 숨어서 겨우 살아남았어요. 그때 총에 맞아 죽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죠."
이 용사는 낙동강 방어선을 시작으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제, 금화, 철원 등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에도 참여했다. 특히 백마고지 전투에서의 치열함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정말 격렬했어요. 산 전체가 불바다였어요. 밤엔 인민군이 공격하고 낮엔 국군이 공격했어요. 말그대로 난리통이었죠. 이동 중 '부대가 적에게 포위됐다'는 얘기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가 중대장을 구출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1953년 휴전 때까지 포병으로 싸웠다. 이후 전우와의 재회는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우는 훈련소에서 같이 포병 훈련을 받았던 '김상훈'입니다. 당시 영남중학교를 다녔는데, 부대 배치 후 엔 연락이 끊겼어요. 지금까지도 생사를 모르는데, 가장 기억에 남고 지금도 너무 그리워요."
이 용사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한겨울 벌판에서 보낸 밤을 떠올렸다.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 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울먹였다.
"칠흑같은 밤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맨손으로 땅을 파고 볏짚을 덮고 누웠어요. 너무 추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잠깐 잠이 들었는데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나왔어요. 아버지가 꿈에 등장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지금도 춥고 배고팠던 당시 전쟁터를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힘을 준 덕분이라 생각해요."
휴전선언 후에도 2년간 군 복무를 하고 1955년 이등상사로 만기제대한 이 용사는 사회 적응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은행에 취직하려고 시험을 봤는데, 군대 다녀온 사람은 안 된다고 했어요. 군대 물든 사람은 안 된다데요. 경찰 시험도 붙었는데 결국엔 장사를 했죠. 이후 평생을 장사하며 살았어요."
이 용사는 6·25전쟁의 교훈이 다음 세대에 제대로 전달돼야 한다고 했다.
"교과서에도 6·25전쟁에 대해 자세히 나오지 않아요.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아직도 세계 위정자들의 욕심으로 전쟁이 반복되는데,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젊은 세대들이 전쟁의 비참함을 반드시 기억하길 바랍니다."

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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