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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순의 문명산책] 모비나의 눈물

2025-06-27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이란에서 온 유학생 모비나가 울고 있다. 이스라엘의 공습에 처참하게 무너지는 고국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며 두고 온 가족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이 비극 속에서도 은밀한 기쁨과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어 내고 있다. 모비나 또래 이란의 젊은 세대들은 "네탄야후 아저씨, 비록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고마워요"라는 조롱을 SNS에 퍼뜨리며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정권을 겨냥한 냉소와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정권에 대한 그들의 불신은 한계에 이르렀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난과 외교적 고립에 대한 불신이 아니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지난 40여 년간 혁명으로 포장된 억압, 정의로 가장된 독재, 신의 이름으로 강요된 불평등에 대한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 시작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이었다. 그해 봄, 이란 국민은 독재자 팔레비를 몰아내고 '이슬람에 기초한 정의로운 국가'를 꿈꾸었다. '신정'(神政)이라는 말이 주는 어색함조차 그땐 희망처럼 들렸다. 정의, 평등, 자주에 대한 호메이니의 약속을 국민들은 믿었고, 이란은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드러난 것은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권위주의였다. 반대자는 처형되었고, 여성은 다시 히잡을 써야 했으며, 표현의 자유는 신성모독으로 처벌받았다. 신정은 정치를 종교로 바꾸었을 뿐, 폭력의 구조는 그대로 남았다.


사람들은 깨달았다. 바뀐 것은 얼굴뿐, 체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체제는 이제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단단히 밀폐된 권력의 성채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이제, '조국'이라는 말은 이란 청년들에게 더 이상 체제를 뜻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외부의 침략은 더 이상 민족의 모욕이 아니라, 권력체제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는 희망이다. "우리는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권력을 더는 따르지 않겠다"는 그들의 선언은 단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2022년 이란 전역을 흔든 '여성, 생명, 자유' 운동의 정신이기도 하다. 히잡 강제 착용에 반대한 여성들의 저항은 국가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다시 묻기 시작했다.


차라리 팔레비 시대로 돌아가는 게 낫다는 주장은 위험하다. 급진적 서구화로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부패의 끝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에게는 키루스 대왕이 남아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이자 유대인의 포로 해방자였던 키루스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구약성서의 고레스왕이다. 그는 종교의 자유, 다민족 통합, 인권의 실현을 천명한 위대한 통치자였다. 이란 청년들에게 키루스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파괴된 문명의 이상을 되찾는 상징이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도약이다. 유럽이 중세의 교권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로마법과 고전 철학을 재발견했듯, 이란은 키루스를 통해 종교적 권위주의를 넘어서려 한다. 그것은 '이슬람 이전'으로의 퇴행이 아니라 '이슬람 이후'를 다시 묻는 전향적 고민이다. 키루스는 관용과 정의의 원형이며, 지금의 모순을 뛰어넘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열쇠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란의 정치 체제는 7세기의 종교 율법에 갇혀 있지만, 이란 시민사회의 윤리는 이미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이슬람 공화국' 대신 '새로운 페르시아'를 원하고 있다. 잃어버린 문명을 회복하는 길은 멀고도 험한 여정이다. 그러나 그 길은 시작되었고, 청년들은 그 기억을 붙들고 있다. 조국의 폐허를 바라보며 흘리는 모비나의 눈물은 잃어버린 문명에 거는 희망의 눈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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