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기 대구시체육회장
스포츠는 신체와 정신을 단련하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장이어야 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스포츠인권헌장은 성별, 나이, 인종, 운동 능력과 무관하게 누구나 차별 없이 스포츠를 즐길 권리가 있음을 명시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현실은 이러한 이상과 너무나도 멀리 있다. 화려한 영광의 이면에는 과도한 경쟁과 폐쇄적인 위계질서 속에서 선수들의 인권 문제가 깊이 뿌리박혀 있다.
최근 몇 년간 스포츠계의 폭력과 인권 침해는 끊이지 않는 사회적 이슈였다. 이에 대응해 체육계로부터 독립된 '스포츠윤리센터'가 출범하는 등 제도적 노력이 이어졌지만, 현장의 체감온도는 여전히 차갑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를 보면, 학생 선수 중 14.7%가 신체 폭력을 경험했으며, 초등학생 38.7%가 폭력을 겪고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답하거나, 중고생 80%가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는 폭력이 '훈련의 일부'로 왜곡되고,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자신의 선수 생명이 끝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만연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일부 가해자의 개인적 일탈이 아니다. 성적 지상주의와 우승을 위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문화, 지도자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선수의 미래가 좌우되는 권위주의적 위계질서가 낳은 구조적 문제다. 지도자의 눈 밖에 나면 상급학교 진학이나 실업팀 입단이 어려워지는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선수와 학부모들은 부당한 폭력 앞에서도 침묵을 강요당한다. 이는 개인의 인권을 팀의 성과와 맞바꾸는 비윤리적 관행일 뿐 아니라, 동료 선수들마저 침묵하는 방관자로 만들어 버리는 폭력의 대물림 구조다. 피해 사실을 털어놓아도 더딘 조사 과정과 미온적인 처벌에 좌절하며, 결국 혼자 상처를 감내하다 그라운드를 떠나는 선수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절실하다. 첫째, 사전예방교육을 통한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선수, 지도자, 학부모 등 스포츠계 모든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인권 교육을 정기적이고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이는 법적 처벌을 피하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상호 존중의 가치를 내면화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대구체육회는 매년 2월 마지막 한 주를 "인권상담주간"으로 정해 전문상담, 인권실태설문조사, 선수단 역량강화, 인권 영화관람 등 다양한 예방교육을 해오고 있다.
둘째, 가해 행위에 대한 명확하고 엄중한 처벌 기준을 세워야 한다. '솜방망이 처벌'이 폭력을 용인하는 문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가해자의 지위나 성과와 무관하게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고,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단체에도 책임을 물어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징계 정보의 투명한 공개와 함께 일정 기간이 지나면 현장에 복귀하는 악습을 근절하고 영구 퇴출을 포함한 실효성 있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셋째, 신뢰할 수 있는 신고 및 상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피해자가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철저한 비밀 보장과 신속한 처리 절차가 전제되어야 한다. 인권 및 심리 전문가를 통한 지원을 연계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하여 실질적인 '안전망' 역할을 해야 한다.
넷째, 피해자 지원 및 회복 프로그램을 통해 신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이 온전히 회복하여 건강하게 스포츠 현장으로, 그리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심리치료, 의료 지원, 법률 자문 등 다각적인 지원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선수의 인권은 더 이상 '성적'이라는 이름 아래 희생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선수들이 안전하고 존중받는 환경에서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을 때, 개인의 인권 보호는 물론 스포츠계 전반의 신뢰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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