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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지대] 시선을 접고, 그늘을 펼치다

2025-08-11 06:00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연암 박지원의 '호질(虎叱)'에는 체면을 앞세우다 똥통에 빠진 곽 선생이 등장한다. 맹렬한 호랑이 앞에서도 체통을 지키겠다며 오만을 떨다, 결국 똥통에 빠지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다. 체면을 생명처럼 여긴 곽 선생의 모습은, 무더운 거리에서 양산을 망설이는 누군가의 뒷모습이다.


어쩌면 지금은, 누구에게나 그늘을 허할 때다. 특히, '남자다움'이라는 굳은 틀에 스스로를 가두어온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양산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다. 폭염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작지만 강력한 도구다. 진짜 뜨거운 것은 햇볕보다 시선이다. 결국 그들을 가로막는 건 태양이 아니라, '성별에 갇힌 시선'이다.


오늘날의 양산은, 기원전 2450년경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 등장했다. 초기에는 왕족과 성직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구였으며, 이후 페르시아와 중국에서도 지배 계층의 전유물로 자리 잡았다.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일시적으로 도입되었지만,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에는 교회의 의례용 장비로만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다 16세기, 아시아와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동양의 이국적 미감과 고급 소재가 유입되면서, 양산은 다시 패션 아이템으로 재등장한다. 특히 백옥 같은 피부가 곧 신분과 부의 상징이던 시대, 양산은 상류층 여성의 필수품이 되었다.


일본의 개항 이후 유럽에 불어온 '자포니즘(Japonisme)'은 양산의 문화적 의미를 한층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유럽 예술가들은 일본의 회화, 공예, 의복, 자연관에서 새로운 감수성을 발견했고, 이는 동양적 미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전통 양산 '와가사(和傘)'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간결한 선과 색을 지니고 있었고, 클로드 모네는 '양산을 든 여인'에서 자연과 빛, 인물의 조화를 그려냈다. 비록 드가와 반 고흐는 직접적으로 양산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일본 회화에서 받은 영향으로 색감과 구도에 변화를 꾀했다. 이처럼 자포니즘은 단순한 예술 유행을 넘어, 동양의 미감을 통해 유럽 화단에 새로운 시각적 언어를 불어 넣었다.


한편, 예술 속에서 찬미하던 양산은 현실에서는 또 다른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19세기 후반 파리 몽마르트르 거리에서는 양산을 든 여인이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얼굴을 가리면서도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는 양산의 특성 탓에, 어떤 이는 숙녀로, 또 다른 이는 거리의 여성으로 오해받았다.


반면, 북유럽에서는 양산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달랐다. 핀란드나 스웨덴처럼 일조량이 적은 지역에서는 태양이 오히려 '귀한 자원'이었다. 사람들은 햇빛을 피하기보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려 했고, 아이들 역시 어릴 적부터 일광욕을 배우며 자랐다. 이곳에서는 양산이나 그늘막이 낯설고, 때로는 불필요한 물건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문화와 기후에 따라 달랐던 양산의 의미는, 이제 세계 곳곳에서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예컨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 뜨거운 햇살이 내려앉은 거리 위로 형형색색 양산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줄지어 선 관광객들 사이, 동아시아 여행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들 가운데, 작게 그늘을 드리운 남성들의 모습도 이제 더는 낯설지 않다.


거리의 풍경은 바뀌었다. 문제는, 바뀌지 않은 시선이다. 볕이 뜨거운 날, 체면은 접고 그늘을 펴자. 지금 우리에겐 그 용기가 더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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