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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8] “군 자금 확보 위해 ” 장인 집 담을 아우와 함께 넘다

2025-08-11 19:53

유망한 사군자화가에서 독립운동가가 된 김진만
양반 가문의 후예에서 무장투쟁 나선 김진우

김진만 선생. 영남일보DB

김진만 선생. 영남일보DB

올해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을 맞아 영남일보는 '내 이름은 투사' 시리즈를 통해 대구를 빛낸 독립운동가 12명을 월별로 조명한다. 8월의 인물은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대한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대구 권총사건'에 가담한 형제, '긍석' 김진만(1876~1934)과 김진우(1881~미상) 선생이다. 문인화가로 이름을 알린 형 김진만과 강한 결단력을 가진 동생 김진우는 1916년 무장투쟁을 통한 군자금 확보에 나섰다. 그날 밤 대구 한 저택에서 울린 총성은 식민권력에 맞선 강력한 저항으로 기록됐다.


◆ 붓과 총을 들었던 긍석 김진만


김진만(金鎭萬)은 1876년 8월24일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재양과 모친 이춘옥 사이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13세 때 대구의 부호 서우순의 장녀 서복과 혼인했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에 능했고,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아내의 삼촌이자, 서예·문인화의 대가 '석재' 서병오에게 그림을 배웠다. 바위, 매화, 난초, 대나무 등을 그리는 사군자화를 주로 그렸다. 스승은 그의 굳은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마치 바위 같다"는 의미로 '긍석(肯石)'이라는 호를 지어줬다.


1901년 스승과 함께 중국 웨이하이, 쑤저우, 난징을 여행하며 당대 화가들과 교류했다. 여기서 그는 예술의 감동과 함께 청일전쟁의 상흔을 목격하며 나라 잃은 현실의 씁쓸함을 마음에 새겼다. 독립운동의 불씨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김진만은 1908년 대구 청년 계몽단체 '달성친목회'에 가입했다. 표면상으로는 청년계몽 단체였지만, 실은 독립운동을 결의한 모임이었다. 1915년에는 동생 김진우와 함께 박상진이 결성한 대한광복회에 합류하며 무장 독립운동에 본격 뛰어들었다.


대구 권총사건 가담자에 대한 판결 보도. '매일신보' 1917년 4월28일자. 김진우는 별도의 사진 기록물이 남아 있지 않다.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대구 권총사건 가담자에 대한 판결 보도. '매일신보' 1917년 4월28일자. 김진우는 별도의 사진 기록물이 남아 있지 않다.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양반에서 무장투쟁가가 된 김진우


김진우(金鎭瑀)는 1881년 7월1일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직업과 교육 이력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형과 함께 계몽운동과 비밀결사 활동에 참여했다.


1908년 달성친목회가 해산되자 재건운동에 적극 나섰고, 1913년 재건이 이뤄졌으나 곧 일제에 의해 다시 해산됐다. 이후 포기하지 않고 국권회복단 활동을 이어가다 1915년 형과 함께 대한광복회에 가입했다.


대구복심법원의 김진만·김진우에 대한 판결문. 출처: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대구복심법원의 김진만·김진우에 대한 판결문. 출처: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군자금 확보 위해대구에 울린 총성 '대구 권총사건'


대한광복회는 비밀리에 무기와 자금을 확보하며 무장 독립을 준비했다. 총사령 박상진은 김진만과 김진우에게 권총을 한 자루씩 지급했다.


형제는 정운일·김재명·최병규·최준명과 함께 군자금 모집 임무를 맡았다. 1915년 대구의 부호 서창규에게 자금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정재학·이장우, 그리고 김진만의 장인 서우순에게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1916년 8월, 이들은 정운일 집에 모여 자금 확보를 위한 적극적인 방안을 논의했다. 김진만은 장인의 집에 거액의 자금이 있다는 정보를 전했고, 이를 빼내기로 했다. 이때 회의에는 서우순의 아들 서상준도 있었다.


한달 뒤인 9월3일. 이들은 서우순의 집 담을 넘어 잠입했다. 서우순이 자고 있던 방까지 들어가려는 그때, 인기척에 놀란 서우순이 소리를 질렀다. 비명 소리를 들은 집사 우도길이 달려왔다. 결국 일행과 집사 간 몸싸움이 벌어졌다. 몸싸움이 격해지자 김진우가 권총을 발사해 우도길을 쓰러뜨렸다.


총성이 울려 퍼지자 온 동네가 소란해졌다. 형제와 일행은 도주했다. 그러나 현장에는 최병규의 고무신 한 짝이 담벼락 밑에 남겨져 있었다. 경찰은 이를 단서로 일행 모두를 체포했다. 일행은 대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재판에 넘겨졌다. 이 사건은 시민들 사이에선 '애국단 사건'으로 알려졌다. 일제 경찰은 이를 '대구 권총사건'이라 불렀다.


이들은 1917년 함께 대구지방법원 법정에 섰다.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던 만큼 지역 관심도 컸다. 판사는 형 김진만에게 징역 10년, 권총을 직접 발포한 동생 김진우에게 징역 12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들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2개월 뒤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돼 옥고를 치렀다.


형제는 대구형무소에 나란히 수감됐다. 축축한 바닥, 곰팡이 냄새, 새벽의 차가운 공기는 일상이었다. 이들은 8년 3개월이 넘게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일제의 형량 감축 정책으로 풀려났다.


김진만은 출옥 후 일제 감시를 피해 은둔하면서 그림에만 전념했다. '괴석란' '난화도' 등 사군자화 작품을 다수 그렸지만, 자신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림에도 제작시기나 설명 등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고, 그러기 위해 정보를 최대한 숨긴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동생 김진우도 출옥 후 자취를 감춰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대구미술관에 전시된 김진만의 '괴석란'. 박영민 기자.

대구미술관에 전시된 김진만의 '괴석란'. 박영민 기자.

김진만의 지조와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작품'묵죽'(왼쪽)과 '기명절지'. 영남일보DB.

김진만의 지조와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작품'묵죽'(왼쪽)과 '기명절지'. 영남일보DB.

◆ 사라진 흔적, 그러나 남아 있는 이름과 뜻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진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1990년 김진우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김진만은 출옥 후 독립운동 기록은 없지만, 그 후손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진만의 둘째 아들 김영우는 만주에서 임시정부 연락과 군자금 모집 역할을 수행하던 중 체포돼 옥고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손자 김일식은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하며 끝까지 건국 활동에 전념했다. 김진우의 후손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형제가 살던 집터는 대구 반월당네거리 인근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이 없다. 이들을 기념하는 묘소나 기념비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이 8년 넘는 시간을 대구형무소에서 보냈지만, 대구형무소 역사관에도 이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대구미술관에는 김진만의 그림 '괴석란'이 전시돼 있다. 그림 한 켠에는 "온 세상 진토 아닌 곳이 없으니, 어디에 향기로운 뿌리 의탁할까 모르겠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당시 그의 당시 심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작품 설명에는 "일제강점기 서화가로서 8년4개월 실형을 산 독립운동가는 김진만이 유일할 것이다. 식민통치에 적극 저항했던 삶과, 출옥 후 문화적 자존을 전통미술로 지키려 했던 시대적 분위기가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김진만은 2015년 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2017년 대구 근현대 문화예술인물 12인에 선정됐다. 그러나 김진우는 형에 비해 대중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 형제가 가담한 대구 권총사건은 당시 민족 독립운동의 의지를 드높였다. 오늘날까지 기억돼야 할 역사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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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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