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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 불행을 대하는 자세

2025-10-02 06:00
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L과 동네 카페에서 만났다. 8월에 동부의 할리팩스란 도시로 가족휴가를 갔었다. 여행이 어땠냐고 물으니 1주일 예정의 휴가가 2주가 되었다고. 사연인 즉 에어캐나다 승무원들의 파업과 맞물려 비행편이 취소되었고 1주일간 발이 묶였단다. 남편과 성인인 두 자녀 모두 직장일에 큰 지장은 없었나보구나, 다행이네 했다. 추가경비에 대한 보상은 받을 수 있냐고 하니, 항공사에 청구했고 안 되면 다른 기관에 청구해볼 수 있다고 했다. 며칠 전에는 캐나다포스트 노조가 파업을 선언했다. 우편물 감소로 인한 재정위기에 맞서, 앞으로 가정 문 앞 배달 대신 지역우편함 제도로 전환하겠다는 정부의 구조조정 계획에 반발해서이다. 6월 유럽여행 때도 사람들이 유럽공항들은 항공사 파업으로 인한 취소가능성이 언제나 높으니 일정에 여유를 두고 움직이라고 했었다. 잦은 파업에 대한 비난은 크지 않았다. 가족휴가에 불편을 겪은 L도 "그건(파업은) 그들의 권리니까"라고 했다.


6월 초, 우리 주 북부 라 론지(La Ronge)라는 작은 도시는 큰 산불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지인들 중에도 집이 완전히 타버리는 상황을 직접 겪은 이들과 그들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의 충격이 컸다.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친구 중 하나인 80대의 H는 그곳에 딸과 여동생네 가족이 산다. 산불 발생 당일 저녁, 딸에게서 연락이 왔단다. 오후만 해도 상황을 지켜보라던 직장에서 퇴근시간 무렵 즉시 대피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그 길로 집에 가 키우는 개들을 태우고 차로 4시간 넘게 걸리는 엄마 집으로 출발한다고. 도시를 빠져나오려는 차량들로 주유소 인근부터 긴 정체가 시작되었고, 자정 가까운 시간에도 도착하지 않는 딸이 걱정되어 H도 밤을 꼬박 새며 기다렸다고. 새벽 4시 가까이가 되어서야 도착한 딸은 다행히 집이 무사해서 며칠 후 돌아갔다고. 반면 동생네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불타버렸고 동생은 연로한 나이에 다시 돌아갈 집을 재건하고 싶지 않다고 사스카툰으로 이사와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단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H에게서 어떤 신세한탄도, 원망도 들을 수 없었던 게 신선했다. 그래서 말했다. 다행이다, 동생이 가까이 살게 되어 너에겐 더 잘 되었네.


'복지국가' 캐나다의 상징과도 같은 무상의료 시스템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무상의료는 제한된 공공자원을 모두에게 나누어야 하니 느리고 불편할 수 밖에 없는데, 특히 응급실에서의 긴 대기시간 등은 악명높다. 본인 가족들이 겪은, 때로는 황당한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료들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어? 한국 같으면 벌써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서 데모를 하든 난리가 났을 걸. 뚜렷한 논리적 답변은 없었지만, 이것이 우리가 가진 제도이고 문제도 있지만 장점도 많으니 그로 인한 문제와 불편함도 우리가 감수한다는 뉘앙스였다.


한국문화의 역동성,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정신이 빛난 많은 역사의 순간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 시간들 속에 형성된 어떤 집단 무의식이, 정당한 권위와 시스템에 대한 존중과 승복조차도 어렵게 만드는 면은 없는지, 공공선에 우선해 조금의 개인적 불편함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건 아닌지.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지금의 한국사회의 우리들은 한번쯤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긴 추석명절 연휴, 가족들과 만나러 가는 길엔 기쁜 만큼 불편함도 클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넉넉히 껴안고 풍성한 한가위 맞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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