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세현 기술보증기금 고객부장
투자가 대세인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회사에 투자해 줄 투자자가 없을까요?" 최근 기업 현장에서 자주 듣는 질문이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여기저기 IR(투자설명회)에 참석한다고 분주하다. 이 현상의 이면에는 자본비용을 줄이고 여유 있는 사업화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지금 당장 투자자를 찾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공정한 기업가치를 올리는 일이다. 아직 내실이 다져지지 않은 상황에서 투자를 유치하면, 투자자는 반드시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지분, 경영권, 심지어 의사결정의 주도권까지 기업인이 양보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결국 동상이몽의 결과다.
이제는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기업인처럼 투자하고, 투자자의 눈으로 경영하는 것이다. 기업인처럼 투자한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무엇이 우리 기업의 성장 자산이 될지를 고민하는 태도다. 설비투자를 할 때도 단순한 생산능력 확충에 그치지 않고, 미래 기술 경쟁력과 시장 확장 가능성을 따져야 한다. 연구개발비를 집행할 때도 지금 당장의 성과보다 3년, 5년 뒤 시장에서 기업가치를 끌어올릴 무기로 만들 수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투자 이전에 기업가치를 높이는 것이 먼저다. 이 과정에서 부채의 레버리지를 활용한 성장도 뺄 수 없다. 금융비용을 계산할 때는 감춰진 자본의 요구수익률도 감안해야 한다. 단기의 비용에 집착하면 혹독한 요구로 되돌아온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투자자의 시각으로 경영하는 것이다. 성장은 속도의 문제이지만 투자는 규칙의 문제다. 기업가의 언어는 가능성이고, 투자자의 언어는 확률이다. 투자자는 숫자에 민감하다. 재무제표 속 매출과 영업이익뿐 아니라, 비용 구조와 현금흐름을 꼼꼼히 살핀다. 투자자가 묻는 핵심 질문은 단순하다. "이 기업이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따라서 경영자는 늘 '생존력'과 '지속 가능성'을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사업의 확장보다 먼저 체질 개선과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
산업현장에서 확인된 성장하는 기업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투자, 그리고 투자자의 시각을 스스로 경영에 적용했다는 점이다. 빠른 성장을 좇기보다 기술력을 축적하고, 인재를 키우며, 시장의 변화를 예민하게 읽었다. 투자 유치의 시점을 앞당기기보다, 스스로 기업가치를 높여 공정한 가치를 인정받는 길을 택했다.
지역 경제는 지금 새로운 성장 동력이 절실하다. 자금은 한정돼 있고, 불확실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기업인과 투자자는 서로를 의심하기보다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기업은 투자자의 눈으로 경영하며 신뢰를 쌓고, 투자자는 기업인의 장기적 안목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공정가치를 형성하고 함께 성장하는 첫걸음이다.
기업은 결국 투자이자, 투자의 대상이다. 기업인이 스스로 투자자의 마음을 이해할 때, 그리고 투자자가 기업인의 고뇌를 공유할 때, 지속 가능한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투자자는 증거로 안심하고, 기업가는 조건으로 보호받는다. 그 접점에서 형성되는 값이 바로 공정가치다. '아직 때가 아닌 투자'를 경계하고, 가치를 먼저 키운 뒤 자본을 불러들이는 순서를 지키자. 그때 기업인과 투자자가 공동의 언어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 그 결과가 기업성장의 가속 페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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