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TV

  • 가을빛 물든 대구수목원, 붉게 타오르는 꽃무릇 군락
  • “익숙함에 새로움을 더하다”…서문시장 골목에서 만난 이색 김밥

[월요메일] 박찬욱, 거장의 귀환 : 不惑之決(불혹지결)

2025-10-12 16:17
이희정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이희정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지난달 24일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는 개봉과 동시에 전국 예매율 1위를 기록하며 거장의 화려한 귀환을 알렸다. 이 작품은 202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미국과 영국 주요 언론은 "올해의 걸작"이라 극찬했고, 로튼토마토 평점 100%를 기록하며 기생충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국 BBC는 이를 "황홀하게 재밌는 한국의 걸작이자 올해의 기생충"이라 평가하며, 세계적 히트작이 될 것이라고 호평했다.


전 세계가 이처럼 그의 신작을 기다리는 이유는 영화의 완성도나 기술적 완벽함이 아니라, 그의 영화에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결을 포착하는 통찰의 미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미로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그 정점은 제75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헤어질 결심'(202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와 로맨스를 결합한 심리 드라마로, 부산의 형사 해준(박해일)이 산에서 추락한 남자의 사건을 수사하며 그의 아내 서래(탕웨이)를 만나 겪는 복잡한 관계를 다룬다. 해준은 처음에는 의심하지만 서서히 그녀에게 끌리며, 형사와 용의자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정을 느낀다. 두 사람은 사랑과 의무, 욕망과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하며 결국 파국에 이른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결심'에 대한 통찰과 시적 미학으로 구성돼 있다. 감독은 감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사소한 행동·눈빛·침묵 속에서 인물의 내면을 그려낸다. 해준의 시선은 작은 표정에 머물며 관객에게 불안을 느끼게 하고, 음울한 바다와 산, 미묘한 조명과 색채 대비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시적 문법'을 완성한다.


결말에서 서래가 바다에 몸을 묻는 장면은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 슬픈 결심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순간의 은유다. 거대한 바다를 배경으로 한 그녀의 몸짓은 외적 사건과 내적 감정이 결합된 자기 결정의 상징이며,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기 내면의 윤리에 따른 선택, 그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결심이었다.


인생에서 결심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한다. 결심은 가능성의 세계를 좁히는 행위로, 여러 길 중 하나를 택하면 나머지는 사라진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라며, 자유는 선택과 그 책임을 홀로 감당함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인물들은 사랑을 통해 자유의 무게를 체험하며, 절정의 욕망 속에서도 함께하기보다는 떠남을 선택한다. 이는 회피가 아니라 상대의 삶을 존중하는 최후의 배려이자, 자기 감정과 책임이 맞물린 결심이다.


'불혹지결(不惑之決)'은 공자의 '불혹(不惑)'에 '결심할 결(決)'을 더한 말로,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을 속이지 않고 성찰 끝에 내리는 명료한 결심을 뜻한다. 즉, 흔들리지 않음이 아니라 흔들린 끝에 다시 중심을 세우는 힘이다. 해준은 진실을 쫓는 형사였지만, 감정과 욕망을 정직하게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반면 서래는 그의 결심 부재를 대신해 스스로 명료한 결단을 내린다. 그녀의 선택은 죽음이라는 극단적 형태였지만, "내가 당신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사라진다"는 역설적 선언 속에는 그녀의 불혹지결의 정수가 들어있다.


우리 삶에서도 결심은 끊임없이 시험받는다. 관계, 직업, 신념 등에서 우리는 늘 선택을 강요받으며, 결심 없는 사람은 타인의 결정에 휘둘리고, 너무 쉽게 결심하는 사람은 자기 삶을 성찰하지 못한다.


지난 추석 연휴에 SBS 다큐멘터리 'NEW OLD BOY 박찬욱' 2부작이 방송됐다. 방송에서는 '새로움'과 '예상치 못함'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박 감독의 독창적인 제작 방식과 인간적인 리더십이 조명되었으며, 이것이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이유로 소개됐다.


비디오 가게 사장으로 출발해 세계적 거장이 되기까지, 박찬욱의 길에는 언제나 '불혹지결'이 함께했다.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이 믿는 미학과 윤리를 지켜온 그의 결심이야말로 예술가로서의 품격이자, 그가 존경받는 이유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