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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지대] 길의 원점에서 마음의 방향을 묻다

2025-10-13 06:00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추석 연휴, 서울 시댁으로 향하는 길이다. 도로 위 차들이 달팽이처럼 더디게 움직였다. 그 답답함을 비집고 내비게이션이 목소리를 냈다.


"도착 시간은 오후 5시40분입니다."


그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속도계 바늘은 달팽이 더듬이처럼 천천히 움츠러들었다. 불빛으로 빽빽한 도로에서 사라진 것은 인내였다. 그럴수록 마음의 속도는 더 빨라졌다. 예전 같으면 지도책을 펼치거나 표지판을 더듬으며 길을 짐작했을 것이다. 이제는 손안의 화면이 모든 길 찾기를 대신한다. 그때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달리는 이 수많은 길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그 물음의 실마리를 두 달 전, 광복절 무렵 광화문광장에서 풀었다. 서울의 중심, 수많은 발자국이 스쳐 지나간 자리. 그 한편에 세월에 닳은 표지석 하나가 있었다. 바로 '도로 원표(道路元標, the zero milestone)'였다. 그것은 지역과 지역 사이의 거리를 알리기 위해 도시의 중심에 세워진 표식이다.


"여기가 대한민국 도로의 원점이에요."


지인의 말에 이끌려 표지석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세월에 닳은 글자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의 이동 끝에, 돌은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1914년 광화문 세종로 한가운데 세워진 도로 원표는 시대의 변화를 견디며 자리를 옮겼다가, 지금 다시 이곳에서 모든 길의 출발점을 지키고 있다. 길이 바뀌어도, 중심은 여전히 여기다.


사람들은 그 앞을 무심히 지나치지만, 그 표지석이야말로 여전히 모든 길의 출발점이다. 누군가의 첫걸음, 누군가의 귀향길이 끝나는, 그 모든 방향의 기준이 되는 자리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비게이션은 그 '기준점'을 우리 손안으로 옮겨온 셈이다. 화면 속 지도는 시시각각 경로를 다시 계산하며 '가장 빠른 길'을 알려준다. 하지만 빠른 길이 늘 '좋은 길'은 아니다.


길의 의미는 속도가 아니라 머무름에 있다.


빠름 속에선, 풍경도 마음도 스쳐 지나간다. 남은 거리가 아니라 남은 시간이 삶의 기준이 되는 시대다. 속도가 방향보다 앞서는 시대, 우리는 종종 길의 의미를 잃곤 한다. 너무 빠르게 달리다 보면, 오히려 방향을 놓치기 쉽다. 그래서일까, 비가 추적이는 고속도로나 터널을 지날 때, 내비게이션 화면이 잠시 멈칫하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된다. 길을 잃어야 비로소 '길'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길의 시작과 끝을 잇는 기준은 어디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광복절 즈음 잠시 마주친 그 돌이 떠올랐다. 길의 시작과 끝을 잇는 그 돌을 보며, 거리의 기준점이 도로 원표라면 마음의 기준점은 집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부엌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고봉밥을 푸던 손위 동서의 마음, 그 마음이 이번 길의 종착지이자 다시 길을 잇는 온기였다.


도로 원표가 도시의 중심에 있다면, 사람의 길은 마음의 중심에서 시작된다. 화면 속 화살표가 알려주는 방향이 아니라, 기억과 정(情)이 이끄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우리는 비로소 마음의 자리를 찾는다. 추석의 귀성길은 잊고 지냈던 '나의 원점'을 향한 여정이었다. 그 길의 끝에서, 당신의 마음이 가족들과 함께 따뜻하게 머물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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