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TV

  • 가을빛 물든 대구수목원, 붉게 타오르는 꽃무릇 군락
  • “익숙함에 새로움을 더하다”…서문시장 골목에서 만난 이색 김밥

[아침을 열며] 저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세상

2025-10-13 06:00
박순진 대구대 총장

박순진 대구대 총장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한가위를 지날 즈음이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마다 동문 체육대회 등을 알리는 연락이 온다. 학교를 졸업하고 삼십 년, 사십 년, 오십 년이 되고 어른이 될수록 없던 애교심도 깊어지고 학창 시절이 그리워진다. 모처럼 만난 오랜 친구와 마주 앉아 지난 이야기를 하며 기억나는 사람과 사건들을 끄집어내어 보면 조각난 기억들이 좀처럼 맞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얼굴도 이름도 추억도 제각각이다 보니 같은 시절, 한 학교, 같은 선생님 밑에서 함께 배운 것이 맞는가 싶은 의심마저 살짝 생긴다.


지난 일들을 회고하다 보면 기억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지도 않거니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왜곡되고 소실되기 마련이다. 친구 몇몇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생생하게 이야기하는 인물이나 장면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머리에는 없을 때 잠깐 난처해진다.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아 있던 일을 어렵사리 꺼냈는데 친구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 한 적도 있다. 같은 반에서 지낸 친구를 다른 반으로 기억하는 반면 한 번도 같은 반인 적 없었던 친구를 같은 반이었다고 우기기도 한다.


흔히 소년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중년은 현재를 이야기하며 노년은 과거를 이야기한다고들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지난 일을 되돌아보는 일이 잦아진다. 새로운 일을 기억하는 일이 쉽지 않다. 세세한 장면은 좀처럼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뒤늦게 학구열이 불타올라 젊을 때 미처 못했던 몇 가지를 시도해본다. 당찬 계획을 세우고 마음을 다잡아 가며 새롭게 배워보리라 다짐해도 생각처럼 쉬이 되지 않는다. 마치 메모리 용량이 꽉 채워져 새로운 데이터를 수용하기 힘든 낡은 하드디스크 같다.


어느새 가을 기운이 완연하다. 그렇게 길고 무더웠던 여름도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기후만 극성스러웠던 것도 아니다. 지난 봄여름 동안 국제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명천지 문명사회에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이 하도 자주 일어나다 보니 이제는 제법 무덤덤해졌다. 강대국 지도자들의 힘을 앞세운 정책으로 안정된 세계 질서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분쟁이 전쟁으로 치닫고 정치적 갈등은 더욱 노골적 양상을 띤다. 편을 나누어 공격하고 배제하는 극단적 갈등이 일상화되었다. 무서운 세상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일들은 경험을 기반으로 하지만 처한 위치나 입장에 따라서 기억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같은 일을 경험하였어도 누군가는 좋게 추억하고 누군가는 나쁘게 떠올린다. 예전에는 직접 보고 현장에서 들은 것들이 기억의 기반이고 출발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교한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분절되고 단편적인 가상 현실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 의도적으로 분단되고 체계적으로 편향된 기억이 대세를 이룬다. 앞으로 우리가 기억하게 될 일들은 정교하게 걸러지고 가려낸 조각들로 채워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지난 봄여름을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올 한해는 어떤 일들이 우리 기억에 남을까. 세대에 따라 기억하는 세상이 다를 것이다. 세월의 길이는 상대적이고 시간 속에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도 상대적이다. 한 해의 경험이 환갑 어른에게는 육십 분의 일에 해당하지만 스무 살 청년에게는 이십 분의 일만큼의 크기로 다가온다. 그만큼 세상의 무게가 청년들에게는 더 엄중할 것이다. 알고리즘이 분절시킨 세상은 청년들에게 더욱 각인될 우려가 크다. 극단적 대결이 잦아진 국제 사회와 국내 정세가 그래서 더 걱정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