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덕률 전 대구대 총장
'20대 남성의 58.7%가 윤석열 후보 지지.' 2022년 대선 직후의 보도였다. 2021년의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도 20대 남성의 72.5%가 오세훈 후보를 지지했다. 60대보다 높은 지지세였다. 꽤 낯선 풍경에 국민은 당혹해했다. '이대남'이 쟁점으로 부상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3년 지나 지난 10월 초,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수행 평가에서 긍정 응답을 가장 적게 한 연령층도 20대였다. 이제 청년 보수화는 엄연한 현실이 됐다.
# 청년 보수화, 언제부터 왜?
청년 보수화는 이미 20여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둔감했고 설마 했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경쟁의 심화∙전면화'였다. 경쟁은 지금의 청년층이 태어날 때부터 짊어진 '삶의 조건'이자 '삶의 토대'가 된 것이다.
그 전까지는 주로 대입 경쟁이 문제였다. 대학 입학 후에는 친구와 어울리며 부모와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었다. 졸업 후에는 취업이 가능했고 이어서 결혼과 내집 마련과 중산층으로의 진입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랬던 대학이 20년쯤 전부터 치열한 경쟁터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취업난 때문이었다. 학점관리, 토익점수 올리기와 자격증 준비 등 스펙쌓기가 대학생 문화로 자리잡았다. 대학뿐만이 아니었다. 경쟁은 고등학교를 넘어 초등학교, 유치원, 심지어 4세 유아에게까지 밀어닥쳤다. '미친' 선행학습, '살인적인' 사교육, 교실 붕괴, 7세 고시, 4세 고시는 이제 우리 교육의 상징어가 됐다.
크게 두 가지 요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익숙했던 평생직장 개념이 뿌리째 뽑혔다.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이 대세가 됐다. '평생 경쟁 사회', '불안 사회'로 던져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학 진학률의 급등이었다. 1980년에 27.1%였던 대학 진학률은 1991년 33.2%를 거쳐 2001년에 70%를 넘어섰으며 2008년에는 80%에 달했다. 경제성장과 미래 불안의 합작품이었다. 대학 졸업장이 직장과 안정을 보장하는 시대는 끝났다. 거기에 집값 폭등까지 겹치면서 청년층의 박탈감, 불안, 분노도 함께 치솟았다.
2010년을 전후해 아픈 말들이 대학가에서 쏟아져 나왔다. '88만원 세대', '잉여세대'에 이어 2011년에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뜻의 '3포 세대'란 말이 등장했다. '지옥같이 살기 힘들고 희망이 없는 나라'라는 뜻의 '헬조선'이 유행한 것도 2010년대 초반이었다. 냉소, 혐오, 관종으로 범벅된 '일베'가 등장한 시기도 2010년이었다. 그 후에도 아픈 조어들은 계속 만들어졌다. 세 가지에 더해 내집 마련, 인간관계, 희망까지 모두 포기한다는 의미의 'N포 세대', 이번 생애는 망했다는 뜻의 '이생망'이 대표적이다. 아예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를 포기한 '고립∙은둔 청년'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펼쳐진 극한 경쟁의 무대에서는 누구든 경쟁 상대일 수밖에 없다. 나의 기회를 뺏는 이는 심지어 적으로 간주된다. 안정된 직장과 지위를 차지하고 그 지위를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불법과 편법을 동원하는 기성세대는 타도되어야 할 공적이다. 그 주인공이 공정과 정의를 입에 달았던 진보 인사일 경우에는 위선자라는 낙인까지 더해져 더 큰 비난이 퍼부어졌다. 일자리와 청년세대의 미래 몫인 국가 자산을 잠식하는 외부인, 특히 중국인들도 쉽게 공격 대상이 됐다.
여성의 대학 진학률과 대졸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급증하면서 여성 청년까지 또래 남성들에게는 새로운 위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청년 남성이 역차별을 주장하고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 사이에 반페미 정서가 힘을 얻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극한 경쟁에 던져진 청년층은 '기회의 공정' 뿐만 아니라 '결과의 공정'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더 노력해 경쟁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줘야 한다는 논리였다. 당연히 상층 청년들에게서 더 두드러졌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패자에게 사회가 자선이나 복지를 베풀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에 청년들이 강력 반발한 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복지, 연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진보 담론에 등을 돌린 것이다. 청년층이 보수주의 세계관과 친화적이게 된 지점이기도 하다.
주목해야 할 것이 더 있다. 먼저 '알고리즘 기반의 플랫폼'들이다. 청년 남성의 실존적∙사회적 불안과 분노를 이용해 돈을 쫓는 사이비 언론과 혐오 콘텐츠 산업이 크게 한몫했다.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철저히 '개별화∙파편화'된 채 '연대와 공동체 훈련'을 받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미디어 독해 교육과 민주주의 훈련도 태부족이었다. 사실상 '경쟁 교육의 실패'인 것이다. 세대 간∙성 간 갈라치기로 표 결집을 노려온 일부 정치권 역시 책임이 적지 않다. 사회통합의 책무를 저버린 '분열의 정치', '정치의 탈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보수화한 청년을 문제집단으로 보는 관점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의 사회구조 하에서 청년 보수화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사실, 실은 그들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외면해선 안된다. 정작 성찰해야 할 이는 지금의 사회구조를 만들어 낸 기성세대와 청년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진보 정치권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걱정해야 할 것은 청년 남성의 극우화 가능성이다. 실제로 그 일면을 금년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 몇 차례 목격했기 때문이다. 1월19일 새벽, 서부지법 폭도들 가운데 청년이 적지 않았고 4월11일 구속 상태에서 풀려난 윤석열을 포옹으로 맞은 이도 과잠(학과 잠바) 입은 대학생이었다. 분명 우려할 현상이었다. 그것은 보수화를 넘은 폭도화, 극우화였기 때문이다.
보수와 극우는 엄연히 다르다. 승자에게는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능력주의 세계관을 넘어 패자와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고 공격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온 사회가 나서서 아니라고 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함께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인 '민주주의와 헌법과 폭력 배제'의 선마저 무너뜨리려는 극단주의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청년 자신도 혐오∙폭력∙극우에 대해서는 비타협∙거부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유있는 항변이 혐오와 폭력의 땔감으로 소비되지 않고 청년의 미래를 밝히는 희망의 동력이 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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