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저녁 모임에서 누군가 "한국인은 왜 불행할까? 세계 경제 10위권 대국인데 말이야"라고 물었다. 특별한 질문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비슷한 물음을 던져봤을 법하다. 그렇지만 스스로에게 물을 때마다 뚜렷한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그는 "내 거울을 봐야 하는데 자꾸 남의 거울을 보고 내 모습을 평가한다"고 말했다.
객관적 지표만 놓고 보면 한국은 분명 많은 것을 이뤘고, 세계가 인정하는 '성공한 나라'다. 살기 편한 나라라는 데도 이견이 거의 없다. 대중교통, 치안, 의료 접근성, 인터넷 속도, 심지어는 배달 인프라까지 일상생활의 편의성만 놓고 보면 이만한 나라도 없다. 하지만 이런 편리함과 성취 속에서도 한국인의 행복 수준은 좀처럼 높아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단순한 모순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편리함이 행복을 약화시키는 일종의 인과관계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편리함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아진 나머지 '편한 삶을 누리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기쁨이 되지 못한다. 국가의 평균 소득·교육·주거 수준이 높아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평균이 올라가면 사람들은 그 평균을 기준으로 삼고, 그 기준에 닿지 못하거나 넘어서지 못하면 '나는 뒤처졌다'는 감정을 경험한다.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나의 행복'이 정의된다.
여기에 미디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SNS 안에선 사람들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 반복 재생된다. 이제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카카오톡 메인 화면에서 타인의 여행 사진과 소비 기록을 보게 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인터넷상엔 "30대면 최소 월급 얼마는 돼야 한다", "자산이 얼마는 넘어야 정상이다" 등 '근거 없는 평균치'가 나돌아다닌다.
알고리즘이 끌어올린 비현실적 성취와 소비, 외모, 라이프스타일은 어느새 보편적 현실인 것처럼 제시되고, 그 앞에서 평범함은 결핍처럼 느껴진다. 언젠가부터 '도파민'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도 역설적으로 작은 기쁨에 반응하지 못하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경주 APEC 기간, 서울의 한 치킨집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와 치맥 회동을 벌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살아보니까 행복이라는 게 별 거 아니다. 좋은 사람들끼리 맛있는 거 먹고 한잔하는 게 그게 행복이더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재용이니까 저런 말 할 수 있지"라며 웃어 넘기기도 했지만,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던 행복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는 말일지도 모른다.
서민지
디지털콘텐츠팀 서민지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