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찬란했기에 더욱 짧았던 생.
그녀의 삶을 다시 떠올리게 한 장소가 있었다. 얼마 전 출향인 힐링캠프의 마지막 일정으로 찾은 백신애 문학관과 생가터였다. 조용한 마을 풍경 속에서 그녀의 흔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생가터 벽면에는 두 모습의 그녀가 나란히 있었다. 한쪽에는 양장을 입고 시대를 향해 도발적인 눈빛을 세운 젊은 여성이, 그 옆에는 한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소녀가 있었다. 두 모습은 한 사람 안에 공존한 서로 다른 온도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문학관 안에는 영천의 옛 풍경이 잔잔히 펼쳐져 있었다. 흙길과 초가집, 오래된 장터의 모습은 그녀가 자라난 일상의 결을 고요히 되살려냈다. 그 풍경을 바라보니, 전통과 변화의 경계에서 살아야 했던 한 여성의 내적 갈등이 새삼 느껴졌다. 자신을 옥죄던 경계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그 단단한 의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또렷한 울림을 준다.
그 의지는 두 개의 '최초'라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1924년, 그녀는 경북도 최초의 여성 교사로 임명되었고, 1929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 '나의 어머니'로 등단하며, 최초의 여성 소설가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이력만으로 그녀의 길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눈부신 시작 뒤에는 이미 굳게 짜인 시대의 틀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열일곱 살 딸을 영천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할 만큼 교육열이 높았지만, 그 기대는 전통적 가치가 뿌리 깊은 지역에서는 그녀가 넘어야 할 또 하나의 경계였다. 백신애는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1925년 조선여성동우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에 가입하며 여성운동에 나섰다. 이 활동은 교사 생활에 부담이 되어 1926년 사임으로 이어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상경 후에도 집회와 강연을 통해 사회적 목소리를 더욱 키워갔다.
1929년 문단에 등장한 뒤, '꺼래이' 발표를 기점으로 그녀는 비로소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초기 작품에서 보이던 거리감은 점차 사람을 향한 이해로 가라앉았고, '촌민들'에서 드러난 "이들이 순박성을 잃은 것은 너무나 남들에게 속아만 오고"라는 문장은 그 변화의 결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문학적 성숙이 진행될수록 그녀의 시선은 개인을 넘어 시대의 구조적 부조리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의 문학은 오래도록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남겨진 문헌을 들여다보며 시대를 뛰어넘는 그 고유한 재능이 주변부에 머물러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깊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외부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았다. 넉넉한 경제력에도 작품집을 내지 않았던 선택은, 인정보다 자신의 내면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고집이자, 타협하지 않는 작가정신의 표현이었으리라.
문학의 길을 걸은 시간은 십여 년이었지만, 그녀가 집필한 시간은 채 6년에 못 미친다. 결혼과 이혼, 가족의 반대, 시대의 낙인, 병고. 삶은 그녀를 쉼 없이 흔들어댔다. 그럼에도 그녀의 손끝은 멈추지 않았다. 짧은 집필의 시간 속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대의 벽에 작지만 깊은 균열을 냈고, 그 흔적은 한국 문학의 결을 새롭게 바꾼 성취로 남아 있다.
문학관을 나선 뒤에도 생가터 벽의 두 얼굴은 오래도록 마음을 붙들었다. 단정함과 결기가 함께 깃든 눈빛. 그 앞에서 문득 이런 질문이 되돌아왔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넘어설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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