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중세 유럽의 의학은 황당함 그 자체였다. 정신 질환을 치료한다며 환자의 머리에 구멍을 뚫고 끓는 기름을 부어 넣었다. 성격이 난폭한 사람을 온순하고 복종적으로 개조한다며 양(羊)의 피를 수혈하기도 했다. 머릿속에 들어간 악령을 쫓아냈을지는 모르나 환자는 즉사했다. 수혈받은 환자는 과도하게 온순해져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흑사병이 돌았을 때도 그랬다. 우물에 독을 넣었기 때문이라며 유대인들을 눈에 띄는 대로 학살했다. 무고한 사람을 마녀로 둔갑시켜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처방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인(聖人)의 뼈를 갈아 마시거나 성지에서 가져온 흙을 상처에 바르기도 했다. 그야말로 의학이 주술의 한계를 넘지 못하던 시대였다.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0)는 질병이 신의 노여움 때문이 아니라 체액, 환경, 생활습관의 불균형이 원인이므로 병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예측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의학적 시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갈렌(기원후 129–216)은 체액 이론을 보다 정교한 생리학적 구조로 확장했다. 동물을 해부하여 근육과 신경의 기능을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유럽은 그들을 윤리적 권위로 절대화했고, 문헌적 정전으로 절대화했다. 교회는 그들의 과학적 실험 정신을 허락하지 않았고, 인체의 해부를 허락하지 않았다. 고대 의학의 불씨는 결국 중세 유럽의 의학에 불을 지피지 못한 채 교회당 안에서 박제가 되고 말았다.
약 700년 뒤, 이븐 시나(980~1037) 혹은 아비센나라는 이름의 이슬람 의사가 등장했다. 그는 우선 히포크라테스와 갈렌을 교회 밖으로 불러냈다. 그들을 절대화하는 대신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고 실험을 통해 교정했다. 질병을 '체액의 성질'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묶어두지 않았다. 정확한 임상기술과 약리학으로 치료하고자 했다. 해부학 지식도 체계화했다. 전염병은 물, 공기, 음식의 오염에서 비롯되어 사람과 사람, 물과 물 사이에서 퍼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코로나 시대 때 경험했던 격리 조치도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논리적·철학적 방법으로 조직화한 최초의 근대적 의학 백과사전 '의학정전'을 펴냈다. 이슬람은 이때 벌써 '비마리스탄'이라는 종합 병원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유럽의 병원이 기껏 시체를 위한 교회의 '자선 시설'로 머물러 있었을 때였다.
중세의 어두움 속에서 신의 권위에 가려져 있던 인간의 몸은 마침내 인간의 언어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그 길을 연 것은 기적도 계시도 아니었다. 그리스의 불씨를 품은 이슬람 학자들이 해부하고 기록하며 병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추적한 결과였다. 심지어 계피나 생강 등 중국에서 수입된 약초나 진맥 전통까지 언급하며, 생명을 향한 질문들을 집요하게 제기했다. 이러한 이슬람 학문이 12세기 라틴어 번역으로 소개되면서 '의학정전'은 17세기까지 유럽 대부분 의과대학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과학의 언어'가 드디어 유럽 의학계에 이식된 것이다. 의학은 더 이상 운명에 대한 체념이 아니었다. 운명을 뛰어넘기 위해 질문하는 인간의 시선을 작동시킨 것이다.
르네상스 의학은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와 갈렌, 고대 중국의 화타(華佗)와 편작(扁鵲), 그리고 이슬람의 이븐 시나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축을 세운 글로벌 지성의 연대였다. 허준의 '동의보감'도 그런 흔적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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