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은 영어로는 contemporary music, 곧 '동시대의 음악'을 뜻한다. 넓은 의미에서 현대음악은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포함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만들어지고 향유되는 모든 음악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다만 서양 클래식 음악의 흐름 안에서 현대음악은, 20세기 이후 등장한 음악을 가리키는 시대적 구분이자, 이 시점을 전후해 조성 중심 어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작곡적 사고와 음악 양식을 함께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아놀드 쇤베르크 <위키백과 제공>
◆조성의 붕괴, 그리고 질문의 시작
현대음악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흔히 언급되는 것은 '무조성'이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장조와 단조, 즉 조성을 바탕으로 한다. 음의 위계와 종속의 개념, 화음의 기능적 연결을 통해 음악은 구조를 형성하고, 긴장과 해소의 흐름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반음계적 어법의 확장과 빈번한 전조로 인해 조성 중심의 질서는 점차 복잡해졌고, 그 중심성은 이전만큼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게 된다. 드뷔시(1862~1918)를 중심으로 한 인상주의 작곡가들은 대상의 인상과 색채를 표현하기 위해 조성과 직접적인 기능 관계를 맺지 않는 화음을 사용했고, 그 결과 기능화성에 근거한 조성 체계는 더 이상 유일한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쇤베르크(1874~1951)는 한 옥타브 안의 열두 음을 동등하게 다루는 '십이음기법(twelve-tone technique)'을 통해, 조성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난 새로운 음 조직 방식을 제시한다.
쇤베르크 '십이음기법'의 음렬(위)과 매트릭스. <C급 클래식 포스팅>
◆하나의 시대, 여러 개의 언어
18세기와 19세기를 각각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로 비교적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면, 20세기 이후의 음악은 특정한 하나의 미학이나 작곡 원리가 시대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조성에 기반한 기존 음악 언어를 넘어, 음악을 조직하는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음악적 변화를 요구하던 시대의 부름에 작곡가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응답한, 동시대적 현상에 가깝다. '십이음기법' 역시 그중 하나의 중요한 사례일 뿐이다.
이러한 다층적 전개는 음악 내부의 변화만으로 형성된 결과는 아니다. 산업화와 이동 수단의 발달, 기술의 진보는 클래식 음악의 지형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전 세기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유럽 음악 중심의 흐름은, 20세기에 이르러 범세계적 차원의 상호 영향 관계로 확장된다. 작곡가들은 특정 국가나 문화권에 국한되지 않고, 서로 다른 지역의 음악적 사고와 재료를 직접적으로 접하며 교류할 수 있게 됐고, 음악 양식 역시 유럽 내부의 계보를 넘어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그 결과, 20세기 작곡가들에게서는 하나의 생애 안에서 서로 다른 음악 언어와 양식이 병존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스트라빈스키(1882~1971)다.
이고르 표도로비치 스트라빈스키 <위키백과 제공>
◆'난해함'이라는 오해
현대음악은 거친 소리, 소음처럼 느껴지는 음향, 불협화음의 연속 같은 이미지로 설명되곤 한다. 단어로 표현할 때 가장 쉽게 호출되는 말이라면 단연 '난해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 '난해함'은 현대음악 고유의 속성이라기보다,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온 음악 관념과의 거리에서 비롯된 감각에 가깝다. 선율과 화성을 중심으로 한 음악에 익숙해진 귀에, 그 전제 밖에서 조직된 소리는 낯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대음악을 처음 접하는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렇게 묻게 된다. "이게 음악이야?"
'난해하다'는 말은 곧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인데,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과연 지금까지 음악을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여왔던가. 음악은 본래 이해보다 감각으로 먼저 도착하는 예술이다. 바흐의 푸가를 들으며 대위법을 계산하지 않고,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으며 형식을 해부하지 않는다.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을 들으며 그것이 왜 서정적인지 논리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음악 감상은 직관적으로 이뤄진다.
조지 크럼이 우주의 느낌을 내고자 만든 나선 은하의 모양의 악보. <1974 C. F. Peters Corporation>
그렇다면 왜 현대음악 앞에서만 유독 '이해'가 요구될까. 우리가 그동안 음악이라고 불러온 것의 모습이 비교적 분명했기 때문이다. 선율이 있고, 익숙한 흐름을 따라 전개되는 소리들 말이다. 그런 경험 속에서 형성된 음악적 감각 앞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직된 소리가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으니,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사고의 개입이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것과 다른 것에서 낯섦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 낯섦이 거부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 따라서 현대음악을 감상하는 일은, 본능을 넘어서는 의지를 전제로 하는 경험이다.
그렇다면 이 본능을 거슬러가며, 현대음악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음악은, 음악을 듣기 이전의 '설득의 문제'로 이동한다. 익숙한 음악처럼 즉각적인 감각과 직관에 기대기 어렵기에, 청자가 시간을 견딜 각오를 하고 공연장을 찾을 만한 동기가 먼저 제시될 필요가 있다.
그 출발점은 작곡가가 작품에 부여한 의미와 가치를 청자와 어떻게 공유하느냐에 있다. 왜 낯선 소리가 선택됐는지, 그 선택이 어떤 질문과 사유의 출발점에서 비롯됐는지를 음악 바깥에서부터 소개한다면, 청자는 비로소 그 소리를 '외면할 이유'보다 '들어볼 이유'를 갖게 되지 않을까.
◆음악을 다시 바라보는 관점
우리가 어떤 음악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작곡가를 좋아해서도, 그가 속한 시대나 양식을 선호하기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결국 하나의 작품이 자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달했는지, 그리고 그 음악이 어떤 감동과 의미를 남겼는지의 경험으로 말미암는다. 그런 점에서 현대음악 역시, 작품과 개인 사이에서 생성되는 의미에 방점이 놓인다. 작곡자가 들려주고자 한 이유와, 청자가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들을 이유가 만나는 지점에서 음악은 비로소 제 의미를 찾는다.
필자에게 현대음악은 '20세기 이후의 음악'을 가리키는 단순한 시대 구분도, '무조성'과 같은 특징의 묶음도 아니다. 현대음악은 하나의 관점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음악'이라는 개념을 소리와 사고의 양면에서 다시 바라보려는 시선이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동시대 작곡가들에게는,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오랫동안 "아름답다" "감동적이다"라는 말로만 음악을 감상해왔지만, 이제는 음악을 나눌 또 다른 언어를 함께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부디 이 글이 현대음악을 외면할 이유보다, 들어볼 이유가 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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