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미국의 50개 주(州·state)는 다 하나씩 별명을 갖고 있다. 델라웨어는 '첫 번째 주(the First state)'다. 연방헌법이 제일 먼저 비준된 곳이라 그 별명을 얻었다. 콜로라도는 '100주년(센테니얼) 주', 독립선언 100주년 되던 해에 연방에 편입됐다는 뜻이다.
캘리포니아는 골드러시에 빗대 '황금의 주'(the golden state)로 불린다. 오클라호마는 '재빠른 자(the sooner)의 주', 빨리 달려 먼저 깃발을 꽂은 사람들이 드넓은 땅을 차지했대서 붙은 별명이다. 플로리다가 '선샤인 주', 하와이가 '알로하 주', 뉴욕이 '엠파이어 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도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 '쇼 미'(보여줘 봐) 별명이 붙은 주
그런데, 미국 중서부에 있는 사실상 허허벌판 땅 미주리의 별명은 '보여줘 주(the show me state)'다. 일부에선 '보여줘'가 아닌 '못 믿어 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정하지도 달갑지도 않을 이런 별명을 미주리 사람들은 부끄럽긴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주가 배출한 유일한 대통령 해리 S. 트루먼(1884~1972) 때문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미주리 사람임을 내세웠고, 집무실 명패 뒷면에도 '난 미주리 출신이야(I'm from Missouri)'라는 문구를 새겨뒀다. 중요한 순간마다 "쇼 미! (보여줘 봐)"를 말한 것도 물론이다.
'쇼 미'는 서부 개척 시대 주를 가로지르는 미시시피강을 건너려는 개척자들에게, 뱃사공이 "뱃삯이 정말 있는지 보여줘 봐"라고 채근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강을 건너자마자 줄행랑치는 이들이 많았으니 돈부터 보여달라는 얘기였고 사람들은 "에잇, 의심 많은 미주리 촌×"이라고 울분을 터트린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쇼 미'가 더 유명해진 데는 하원의원 윌리엄 밴디버의 연설이 한몫했다. 그는 1899년 의회에서 "거품 문 공허한 웅변으론 나를 설득하지도, 만족시키지도 못합니다. 난 미주리 출신이요, 뭔가 명확한 걸 보여주세요"라고 말해 '쇼 미'를 세상에 각인 시켰다.
1939년엔 '난 미주리 출신이야'라는 같은 이름의 코미디영화도 개봉됐다. 이후 그 말 자체가 '난 의심이 많아'라는 숙어로 변용됐고 영어사전도 그렇게 정의하게 됐다. 그러니 트루먼이 책상에 앉아 자기에게 보이는 명패 뒷면에 '미주리 출신'이라 적어둔 건 "정책 결정 전 일단 의심을 해보자"란 철학을 써놓은 것이다. 그런 뒤 실행한 정책의 모든 책임은 오롯이 제가 지겠단 결기를 다진 것이다.
# 윤석열이 열렬히 사랑한 명패
이쯤 되면 눈치를 챘을 것이다. 글 제목이 '책임지는…'이고 트루먼과 명패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다. 대한민국 국민이 근 3년, 좋건 싫건 한없이 보아온 '더 벅 스탑스 히어(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 명패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그 패 뒷면에 '난 의심이 많아'란 문구가 있다는 걸 상기시키고 싶어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제일로 '아끼고 사랑하고 자랑하고 싶어 한' 걸 꼽으라면 아마 트루먼 명패를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2022년 5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물한 이 호두나무 '좌우명 패'를 윤 전 대통령은 틈만 나면 자랑했고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안달을 냈다.
몇 번 하지도 않은 기자회견 때마다 명패를 전면에 배치했다. KBS와 신년 대담을 할 때 국민이 정작 듣고 싶어 하는 얘기들은 대충 얼버무렸으나 앵커에게 명패 설명, 자랑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대통령실은 'the buck stops here' 명패만 빈 책상 정중앙에 놓인 사진을 '대통령 집무실'이란 제목으로 내놓기도 했다.
윤 전 대통령은 20대 대통령선거 출정식 때 "대통령 권력은 유한하고 책임은 무한하다. 이 명백한 사실을 1분 1초도 잊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다. 당선 전후 방송에 나와 "대통령 집무실에 트루먼이 강조한 '책임' 좌우명 패를 놔두고 싶다"라는 말도 자주 했다. 바이든이 이걸 듣고 백악관 나무를 깎아 만든 패를 선물한 것이라 한다.
# 내가 책임진다는 공염불
12·3 비상계엄 이전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윤 전 대통령이 책임지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태원 참사 며칠 뒤 "엄연히 책임이라 하는 것은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져라, 이건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해 되레 책임지지 않는 정부의 전형을 보였다는 비판을 들었다.
비상계엄 나흘 후 3차 대국민담화에서 "저는 이번 계엄 선포와 관련해 법적, 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거의 유일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공염불로 끝났다. 이후 헌법적 형사법적 소추 재판 과정에서 그는 전적으로 책임을 회피했고 부하들에게 그걸 전가하기에 급급했다.
곽종근과 말싸움을 했고 여인형에겐 "뭣도 모르는 놈이 방첩 사령관" 같은 막말을 했다. 급기야 홍장원에게 "피고인,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겁니까"라는 질책까지 들었다. 그런데도 "총리나 국무위원 누구도 '계엄 선포해 봐야 하루 이틀이면 해제돼 정치적으로 역공당할 수 있다'란 말을 해주지 않았다"라며 참모 탓을 거듭했다.
윤 전 대통령에게 의심해보고 반추하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해 정책을 결정한 흔적은 찾기 힘들다. 대신 주요 순간마다 폭탄주를 마셔댄 정황만 겹겹이 쌓였다. 심지어 계엄이 무위로 돌아가자 김용현에게 "거봐, 내가 국회에 한 1천 명은 보내자고 했잖아. 이제 어떡해…"라고 짜증 냈다지 않는가. 온갖 재판에서 계엄은 계몽이고 국민을 깨우려는 메시지였단 헛소리 변명만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재판장마다 "내란 세력들이 아무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라고 질책하고 있는 것 아닌가.
# "제발 징징대지 좀 마라"
다시 트루먼 얘기로 돌아오자. 제2차 세계대전 승리 직후 트루먼은 원자폭탄 개발책임자 오펜하이머를 만났다. 오펜하이머가 "내 손에 인류의 피가 묻은 느낌"이라며 울상을 짓고 볼멘소리를 했다. 트루먼은 그저 웃었다. 그러나 그가 방문을 나서자마자 "저 징징대는 '개××'를 앞으론 절대 내 방에 들이지 마라"라고 소리쳤다.
의심하고 반추하며 숙고 끝에 결정을 내리고 거기에 오롯이 책임을 지겠다는 트루먼의 눈에 오펜하이머는 그저 징징대는 무엇일 뿐이었다. 그 트루먼이 지금 윤 전 대통령을 만난다면 뭐라고 말을 할까. "아, 대통령답게 제발 징징대지 좀 마라"라고 말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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