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드라마 '프로보노'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tvN에서 방영된 12부작 법정 휴먼 드라마로, 공익소송팀을 중심으로 법과 권력, 약자의 현실을 다룬 작품이다. 극본의 문유석 작가는 판사 출신으로 '미스 함무라비'를 통해 법정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며, 여러 저작에서 법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어왔다. 연출의 김성윤 감독은 '이태원 클라쓰' 등에서 대중성과 사회적 감각을 보여준 인물로, 프로보노는 법이 권력의 방패이자 약자의 희망이 될 수 있는 불균형을 직시한다.
드라마의 제목 프로보노(Pro Bono)는 라틴어 '공익을 위하여(Pro bono publico)'에서 온 말로, 변호사가 무료로 공익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을 뜻한다. 작품은 이 개념을 단지 장식적인 윤리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의는 왜 돈이 없으면 멀어지는가"라는 질문을 드라마의 중심에 놓는다. 정의는 종종 법정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된다. 판결문 속에, 법조인의 언어 속에, 혹은 승소와 패소의 결과 속에 정의가 담겨 있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프로보노는 그 익숙한 착각을 깨뜨리며, 통쾌한 승리보다 법의 언어가 닿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먼저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엘리트 판사였던 강다윗이 있다. 그는 의문의 비리 사건에 연루되면서 법복을 벗고, 하루아침에 명예도 권력도 잃은 채 법조계 중심에 설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로스쿨 동기이자 대형 로펌의 핵심이 된 인물이다. 다윗은 복귀를 기대하지만, 정작 배치된 곳은 로펌의 중심이 아니라 구석에 방치된 '매출 제로'의 공익소송 전담팀 프로보노팀이다. 처음의 강다윗은 냉소적이며, 이 일을 재기를 위한 임시 경로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맡게 되는 사건들은 기존의 권력형 재판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산업재해로 가족을 잃은 노동자,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세입자, 사회적 편견 속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외국인 여성과 장애인의 사건들이 하나씩 그 앞에 놓인다. 프로보노팀의 사건들은 법정의 거대한 논리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무너진 사람들의 마지막 호소였다.
팀에는 오랫동안 공익소송을 맡아온 변호사들과 젊은 팀원들이 함께한다. 다윗은 그들과 부딪히고 갈등하면서도 점차 변해간다. 법정에서 이기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애초에 법이 닿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정의의 시작임을 배우게 된다.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가며 드라마는 더 구조적으로 확장된다. 각각의 사건은 단순한 개인 분쟁이 아니라, 약자가 반복해서 패배하도록 설계된 사회 시스템과 연결돼 있음을 드러낸다. 로펌과 기업, 정치권은 프로보노팀의 움직임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하고, 강다윗은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후 그는 명예와 복귀의 기회를 제안받지만, 그 대가로 침묵해야 했다. 출세만 좇던 과거라면 받아들였을 선택이지만, 이제 그는 달라졌다. 결국 강다윗은 안전 대신 진실을 택한다.
이제 그는 스스로 묻게 된다. 정의란 법정에서 이기는 것인가, 아니면 누구도 버려지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인가. 공익이란 자선인가, 아니면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책임인가.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의는 타인의 고통이 사실은 같은 사회를 구성하는 균열임을 알아보는 감각이다. 드라마 프로보노는 모든 악인이 징벌받고 약자들이 구제받는 통쾌한 결말을 택하지 않는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승소와 패소가 교차하며, 어떤 피해자는 끝내 법의 구제를 받지 못한다. 이처럼, 정의란 완성된 승리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을 드라마는 말해준다.
'동주공제(同舟共濟)',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다. 법의 언어가 닿지 못하는 사람들의 절박함은 결코 사회 밖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내부의 균열이며, 정의는 그 균열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같은 배를 탄 우리는 함께 강을 건너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정의이며,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공동체 리더십의 본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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