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한참 전의 일이 떠올랐다. 'TK(대구경북) 행정통합 동의안'이 경북도의회를 통과하면서 오랫동안 닫혀있던 기억의 문이 불현듯 열렸다. 지난 2011년 이명박 정부 시절이다. 신공항 입지를 놓고 부산과 대구경북의 갈등이 심각해지자, 수도권에서 신공항 백지화 주장이 나왔다. 수도권 언론들이 '고추 말리는 공항'이라며 지방공항을 조롱하기도 했다. 신공항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한 의원이 나섰다. 당시 대구 동을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유승민 전 의원이 "시골 쥐들은 KTX 타고 서울역에 올라와 인천공항까지 오면 되지 않느냐는 (수도권의) 오만한 생각은 국가의 미래와 지역 균형발전에 대한 철학 부재를 자백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놨다. 유 전 의원의 발언이 생각난 것은 신공항 백지화 주장과 비슷한 흐름이 TK 행정통합 특별법 국회 논의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구경북 '통합' 논의는 이제 여의도로 옮겨진다. 대구와 경북의 합의로 만든 특별법 조문이 300개가 넘는다. 중앙부처의 권한을 대폭 넘겨받는 게 핵심이다. 권한 이양은 단순히 사무를 넘겨받는 게 아니다. '지방 주권'의 문제다. 대구경북의 운명에 대한 주도권을 스스로 가지는 통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수도권 일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만들어감으로써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동의하지만, TK 행정통합은 경제적 논리를 넘어서는 차원이다. '대구경북을 어떤 공동체로 만들 것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는 여정이다. 수도권이라는 거대한 '타자'에 대응해 대구경북의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실존적 몸부림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저서에서 지방의 자치 기구는 '자유의 초등학교'와 같다고 했다. 초등학교가 아이들에게 지식의 기초를 가르치듯, 지방자치가 시민들에게 자유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봤다. 시민들이 작고 구체적인 문제를 직접 해결하다 보면 정치가 나와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익과 직결된 실질적인 활동으로 깨닫게 되고, 결국 능동적 주권자로 우뚝 설 수 있다는 설명이다. 토크빌은 중앙정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는 '영혼 없는 거대한 기계'와 같다고 꼬집기도 했다.
대구시와 경북도, 지역 정치권은 중앙정부의 시혜적 정책에 목을 매는 '천수답 행정'을 벗어나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다시 없을 기회다. 20조원이라는 전례 없는 인센티브로 지방 주권의 경제적 토대가 마련됐다. 무엇보다 '다극 체제'를 강조한 이 대통령의 의지가 중앙부처의 관료주의와 이기주의를 찍어누를 수 있다. 중앙부처는 특별법 논의 과정에서 특정 지역만 규제를 푼다면 혼란이 올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울 가능성이 높다. 지방의 역량 부족이나 토착세력과의 결탁, 사고 발생 시 재정적 뒷감당의 국가 책임 우려도 나타낼 것이다. 중앙정부와 수도권의 '방해공작'을 잠재우기 위해선 TK 행정통합이 국가 개조의 출발이고, 균형발전의 최후 보루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타 지역과의 입법 공조도 필요하다. 대구경북과 마찬가지로 광주전남도 통합 특별법을 발의했다. 광주전남과 연대해 특별법이 특정 지역의 이익이 아닌 국가 구조개혁의 표준모델임을 적극 알려야 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지금 대구와 경북은 주인으로의 삶과 노예로서의 삶의 기로에 서 있다.
조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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