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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지대] 무엇이 사람을 그 사람이게 만드는 것일까

2026-02-09 06:00
이은미 변호사

이은미 변호사

큰어머니는 류머티스 관절염이 심해서 잘 움직이지 못하신다. 큰어머니는 거동이 어렵기 때문에 집안 행사에도 큰아버지만 왔고,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큰어머니를 자주 보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큰어머니에게 치매 증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큰어머니를 뵈러 큰댁에 찾아갔다.


큰어머니는 오랜만에 본 나를 붙들고 큰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말씀하셨는데, 침대에 누워서 움직이기 어려운 큰어머니를 놔두고 큰아버지가 옆방에 여자들을 불러서 논다는 것이다. 당시 집에는 우리밖에 없었는데 큰어머니는 지금도 저 방에 여자들이 있다고 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어 큰어머니는 얼마 전 병원에 입원했을 때 큰아버지가 다른 환자의 보호자인 아줌마의 번호를 땄다며 흥분하셨다. 큰아버지는 같은 질병을 가진 환자의 보호자이자 간병인으로서 정보를 얻으려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을 뿐이라고 했다. 나도 친정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다른 환자의 보호자(간병 선배)의 번호를 따서 이것저것 물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큰아버지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큰아버지가 "이 사람아 서로 물어보고 도움 주고, 그게 사람 사는 정이지" 라고 하자 큰어머니가 나를 쳐다보고는 "여자 번호 따는 게 사람 사는 정이란다. 드러버라"라고 하셨다.


큰어머니는 특히 '양촌리'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큰어머니께서는 요즘 종편에서 재방송하는 '전원일기'를 정주행 하시면서 빠지셨는데, 과거에 전원일기를 보셨던 기억을 잊은 것인지 전원일기를 리얼프로그램으로 오해하셔서 양촌리 김 회장인 최불암 배우님과 김혜자 배우님이 진짜 부부이고, 그 마을이 진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계셨다.


나는 큰어머니의 치매 증상에 대한 언질을 들었었기 때문에, '아.. 이런 증상이구나' 하고 그냥 진지하게 듣는 것처럼 반응했다.


큰어머니는 전원일기에 나오는 동네 양촌리가 공기도 좋다고 하시면서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다는 얘기, 김 회장 집은 방이 없을 거 같고 다른 집에는 민박도 될 것 같다는 얘기들을 진지하게 하셨다. 나는 가벼운 맞장구를 치며 큰어머니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경기도에 살고 있었는데 큰어머니는 그것을 기억하시는지 나에게 "니는 경기도 사니까 좋겠다"라고 하셨다. 내가 "왜요?" 하고 물으니까 "양촌리 거가 쌀하고 고춧가루 좋데이. 니는 가깝잖아. 쌀하고 고춧가루는 거서 사먹어라"라고 하시는 것이다.


계속 숙연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건만 그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크게 터져 나와서 한참을 웃었다. 큰아버지는 나를 실성한 사람처럼 바라보셨고 나는 조신하게 잘 있다가 그렇게 웃어버린 내가 참 아쉬웠다.


큰어머니만이 그 웃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쌀과 고춧가루는 꼭 양촌리에서 사 먹어야 된다'는 당부를 계속하셨다. 나는 꼭 양촌리에서 사 먹겠다고 큰어머니와 약속했다.


큰어머니는 기억을 잃어 가지만 여전히 큰어머니이고, 가족에게 소중한 존재다. 어떤 사람은 사고로 몸의 반을 잃고서도 여전히 그 사람이다. 무엇이 사람을 그 사람이게 만드는 것일까.


큰어머니께 보내드리려고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 '양촌리 쌀'을 검색해 보았으나, 양촌리는 존재하지만 따로 쌀을 쇼핑할 수는 없었다. 쌀을 사면서 든 생각인데, 어쩌면 살아 있는 것 자체로 이미 사람의 삶은 완성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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