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2일 300여명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
이상백·이영식 등 주도, 주민들 태극기 들고 비폭력 시위
일제의 혹독한 진압과 실형 선고 기록 고스란히
구미 인동에 위치한 '인동 3·12독립만세운동 기념탑' 모습. 김현목 기자
지난 1일,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봄이라 부르기엔 바람이 차가웠다. 3·1절이었지만 도심은 비교적 고요했다. 공장 가동이 멈춘 경북 구미는 휴일의 정적 속에 더욱 한적하게 느껴졌다. 반면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이 적지 않아 묘한 대조를 이뤘다. 이런 날, 구미 인동 뒷산에 자리한 '인동 3·12 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찾았다.
기념탑은 인동 주택가와 멀지 않았다. 원룸 건물과 4층 남짓한 아파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야 했다. 비탈길과 계단을 오르자 길 가장자리에 꽂힌 태극기들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다. 바람을 타고 펄럭이는 태극기들만이 이곳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참배객이나 산책객은 보이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자 기념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에는 하늘로 치솟은 탑이 서 있고, 횃불을 형상화한 상단 조형물이 구름 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두 팔을 높이 든 세 인물 동상이 자리한다. 한복 차림의 여성과 평범한 차림의 남성들. 특정 영웅을 기리는 형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이름 없는 민중의 얼굴에 가깝다. 1919년 3월 12일 인동에서 울려 퍼졌을 "대한독립 만세"의 외침을 형상화한 듯했다.
구미 인동에 위치한 '인동 3·12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에 오르기 전 만날 수 있는 만세바위. 김현목 기자
동상 뒤편 바위에는 '3·12 독립만세운동'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주변에는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이름과 행적을 기록한 안내판이 둘러서 있다.
기념비에는 당시 상황이 비교적 상세히 담겨 있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물결은 열흘 남짓 뒤 인동 장터와 마을로 번졌다. 기독교 신자이자 국권 회복을 염원하던 이상백, 이영식, 이내성 등이 중심에 섰다.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이 독립선언서 20매를 들고 고향 인동으로 내려오면서 준비는 본격화됐다. 이상백의 집에 이명시, 이영기, 임용섭 등이 모여 선언서를 등사했고, 거사에 쓸 태극기도 손수 제작 됐다.
1차 거사는 3월 12일 오후 8시 무렵, 현재 기념탑이 자리한 뒷산 바위 일대에서 벌어졌다. 주민 300여 명이 모였고, 이상백과 이영식이 바위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틀 뒤인 14일 오후 8시쯤에도 200여 명이 다시 모여 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비폭력 시위였지만 일제의 대응은 가혹했다. 많은 주민이 체포됐고, 잔혹한 고문이 자행됐다.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은 이상백에게 징역 2년, 이내성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이영래·임중섭·임용섭·박중술 등에게도 각각 징역 10개월이 내려졌다. 그 밖에도 수많은 주민이 6~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거나 태형 90대를 맞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구미 인동 3·12독립만세운동 기념탑에 오르는 길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김현모 기자
이날 기념탑 주변은 잘 정돈돼 있었다. 비탈길을 따라 펄럭이는 태극기와 깨끗하게 관리된 시설이 공간의 의미를 더했다. 다만 비탈길 입구에 별도의 안내문이 없어 초행길 방문객은 이 길이 맞는지 잠시 망설이게 된다. 작은 안내판 하나가 있었다면, 이 공간의 문턱은 조금 더 낮아졌을 것이다.
김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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