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바다 가르는 단 하나의 신호
항로의 시작과 끝, 두 등대의 역할
경북 울릉군 울릉읍에 위치한 행남등대 전경. 홍준기 기자
독도에서 바라본 독도 등대 전경. 홍준기 기자
짙은 해무가 바다 위를 낮게 깔아앉힌 아침, 행남등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제 빛을 돌리고 있었다. 파도 소리는 가까이서 들리지만 시야는 몇십 미터 앞에서 끊긴다. 이럴 때 사람의 눈은 쉽게 길을 잃지만, 등대의 빛은 늘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회전한다. 그 규칙성이야말로 바다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신호다.
영남일보 기획 <경북 동해안 등대 로드>의 마지막 여정은 뭍을 떠나 거친 파도를 뚫고 닿는 섬, 울릉도.독도다. 울릉도 동쪽 절벽 끝에 자리한 행남등대는 겉보기에는 아담하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해안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이곳을 '전망 좋은 포인트'쯤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맑은 날이면 푸른 동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해질 무렵에는 붉은 노을이 등대 유리창에 비치며 한 장의 엽서 같은 풍경을 만든다. 그러나 이곳을 오래 지켜본 사람들에게 등대는 풍경이 아니라 '기능'이다.
등대 주변에는 각종 기상 관측 장비와 해양 감시 시설이 함께 들어서 있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 습도와 기압, 파고까지 실시간으로 수집되는 데이터는 단순 기록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다. 울릉도 인근 해역은 맑다가도 순식간에 안개가 끼고, 파도가 높아지는 일이 잦다. 특히 봄철과 초여름에는 해무가 자주 발생해 시계가 급격히 짧아진다.
울릉도 저동항에서 행남등대로 가는 오솔길. 홍준기 기자.
울릉도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권인철(62) 씨는 "해무가 낄 때는 GPS도 좋지만 결국 마지막에 믿는 건 눈에 보이는 불빛"이라며 "행남등대 불빛이 잡히면 방향이 잡힌다"고 말했다. 바다는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그 위를 오가는 인간에게 방향은 늘 흔들린다. 그래서 등대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역할을 한다.
행남등대 아래로 이어지는 해안산책로는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곧바로 깎아지른 절벽과 거친 바다가 맞닿는다. 울릉도의 지형은 전반적으로 급경사이고, 해안은 대부분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잔잔한 날에는 평온하지만, 기상이 나빠지면 그 풍경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변하는 환경 속에서 등대는 변하지 않는 기준점으로 존재한다.
경북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에서 행남등대로 이어진 해안 산책로. 홍준기 기자
이 기준점은 울릉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동해를 더 깊숙이 들어가면 또 하나의 등대가 같은 역할을 이어받는다. 대한민국의 가장 동쪽 끝, 독도에 자리한 독도등대다.
울릉도에서 배를 타고 약 세 시간 남짓을 더 가야 닿는 독도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다. 날씨가 조금만 나빠져도 배편이 끊기기 일쑤다. 그만큼 주변 해역은 변덕스럽고 거칠다. 독도등대는 이 같은 환경 속에서 항로를 지키는 마지막 신호다. 울릉도에서 출항한 선박이 독도에 접근할 때, 눈에 들어오는 첫 구조물이 바로 이 등대다.
독도등대는 기능적으로는 행남등대와 다르지 않다. 선박의 위치를 알리고, 암초와 해안을 구분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훨씬 복합적이다. 이 등대는 단순한 항로 표지가 아니라, 이 해역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거친 바람과 파도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빛은 그 자체로 존재의 증명이다.
두 등대 사이의 거리는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지만, 항해의 흐름 속에서는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다. 울릉도의 행남등대가 출항의 기준이라면, 독도등대는 도착의 기준이다. 시작과 끝을 각각 맡고 있는 셈이다. 그 사이 바다는 늘 변하지만, 이 두 지점은 변하지 않는다.
해가 지고 나면 울릉도의 바다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낮 동안 반짝이던 수면은 검게 가라앉고, 섬 곳곳의 불빛이 하나둘 켜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정한 리듬으로 빛을 내는 것이 등대다.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빛은 보는 이에게 묘한 안정감을 준다. 그것은 단순히 밝기 때문이 아니라,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독도 역시 마찬가지다. 밤바다 위에서 독도등대의 불빛은 주변의 어떤 빛보다도 또렷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지만, 자연 속에서는 오히려 자연의 일부처럼 작동한다. 바다와 바람, 안개와 어둠 속에서 등대는 그저 제 역할을 반복할 뿐이다.
상공에서 바라본 독도 전경. 홍준기 기자
행남등대와 독도등대. 하나는 사람들이 일상처럼 오르내리는 길목에 있고, 다른 하나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섬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두 등대 모두 같은 바다를 향해 같은 방식으로 빛을 보낸다. 그리고 그 빛은 오늘도 누군가에게 방향이 되고, 기준이 되고, 때로는 안도감이 된다.
울릉도의 아침 해무 속에서 시작된 그 빛은, 결국 독도의 바람 끝까지 이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등대를 바라본다. 이유는 단순하다. 바다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이 가장 믿을 만하기 때문이다.
홍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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