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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K 시대정신의 보고를 찾아서 ⑧]20년 옥고 견딘 독립운동가 박희광 선생, 한국전쟁 후 어려운 이웃부터 품었다

2026-08-09 09:20

대한통의부 3인조 친일파 처단조 핵심…사형 선고 뒤 20여 년 만기 복역
광복 후 김구 선생 경호 맡고 피란민에 장사 밑천 나눠준 삶
“공적에 걸맞은 재평가 필요”

구미 남통동 금오산 도립공원입구에 독립운동가 박희광 선생 동상 및 기념 조형물이 조성돼 있다. 김현목 기자

구미 남통동 금오산 도립공원입구에 독립운동가 박희광 선생 동상 및 기념 조형물이 조성돼 있다. 김현목 기자

2일 오전 8시30분 구미 남통동 금오산 도립공원입구. 맑은 날씨 속에 금오산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주말 아침이라 차량과 등산객이 하나둘 금오산도립공원 앞 도로를 지나갔다. 그 길목 한가운데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1901~1970) 동상이 시민들을 맞았다.


구미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공간답게 주변은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광장을 채운 석재 블록은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고 동상 뒤편으로 이어지는 금오산 둘레길 데크도 작은 쓰레기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원통형 받침대 위엔 황금빛 박희광 선생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오른손을 들어 독립 의지를 다짐하는 듯한 모습으로 금오산 자락을 응시하고 있다. 받침대 정면엔 검은 오석에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지상(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197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필휘호를 내렸다.


동상을 중심으로 곡선 형태 조형물이 반원을 이루며 둘러싸고 있다. 한쪽엔 태극 문양과 한반도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자리했다. 그 옆엔 선생을 추모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반대편은 태극기를 펼쳐 든 모습이 담겨 있으며 주변 연보석엔 선생의 생애와 항일투쟁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돼 있다.


동상 뒤편으로는 금오산 둘레길이 이어진다. 이곳은 등산객과 관광객, 시민들이 오가는 공원 관문이다. 금오산을 찾은 시민과 관광객들은 산책길에서 자연스럽게 박희광 선생의 삶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마주하게 된다.


박희광 선생은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만주 서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지낸 일송 김동삼 선생 휘하에서 활동했다. 이후 대한통의부 소속으로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모집 임무를 맡았다.


대한통의부 3인조 친일파 처단조 핵심으로 활동하던 중 일제에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무기형으로 감형됐지만 20여 년 옥고를 치른 끝에 광복과 함께 출옥했다.


구미 남통동 금오산 도립공원입구에 독립운동가 박희광 선생 동상이 위치한 가운데 동상 좌측에 태극·한반도 조형물과 넋을 기리는 추모 시구가 자리하고 있다. 김현목 기자

구미 남통동 금오산 도립공원입구에 독립운동가 박희광 선생 동상이 위치한 가운데 동상 좌측에 태극·한반도 조형물과 넋을 기리는 추모 시구가 자리하고 있다. 김현목 기자

박 선생의 아들 박정용(76) 박희광선생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훈장을 내세우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어려운 이웃을 먼저 챙기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박 처장은 "아버지는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 독립운동 경과를 보고했고 이후 김구 선생 경호를 맡기도 했다"며 "김구 선생이 서거한 뒤 큰 충격을 받으셨고 대구에 내려와 조용히 지내셨다"고 말했다.


선생은 독립운동을 마친 뒤에도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 한국전쟁으로 피란민들이 대구에 몰려들자 광복 후 받은 위로금을 그들을 위해 사용했다. 생활이 막막한 피란민들에게 아이스케키와 풀빵, 오징어 등을 팔 수 있도록 장사 밑천을 마련해 줬다. 손수레도 내어줘 대구역에서 짐을 나르며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박 처장은 "아버지는 가진 것을 나눠주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셨다"며 "20년 가까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다 보니 결국 우리 집안 형편도 어려워져 왜관으로 이사해 힘들게 살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단 한 번도 후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일제 고문은 출옥 이후에도 선생을 놓아주지 않았다. 모진 고문 후유증은 평생 선생을 괴롭혔지만 그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고통보다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동지들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줬다. 총상을 입은 동료를 모닥불 곁에서 치료했던 일과 여순형무소에서 함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박 처장에게 어린 시절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박희광 선생 동상 우측에 설치된 석조물엔 만주에서 펼친 독립운동 당시의 모습이 표현돼 있으며 선생의 공적이 상세히 기록된 연보 비석이 새겨져 있다. 김현목 기자

박희광 선생 동상 우측에 설치된 석조물엔 만주에서 펼친 독립운동 당시의 모습이 표현돼 있으며 선생의 공적이 상세히 기록된 연보 비석이 새겨져 있다. 김현목 기자

박 처장은 또 잊지 못할 장면을 떠올렸다.


그는 "독립군을 소재로 한 영화를 함께 봤는데 영화가 끝나자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셨다"며 "어릴 때는 왜 그러시는지 몰랐지만, 커서 생각해 보니 나라를 되찾기 위해 청춘을 바친 분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가장 큰 자긍심"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박희광 선생 공적에 걸맞은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잊혀진 국민 영웅 독립운동가 박희광 선생 보훈학적 재조명'을 집필한 영남이공대 김태열 교수(한국보훈포럼 회장)는 박희광 선생이 국내 독립운동가 가운데 두 번째로 긴 기간 만기 복역한 인물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김 교수는 "박희광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반평생을 항일투쟁에 헌신했고 장기간 옥고를 치렀음에도 끝까지 지조를 지킨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라며 "독립운동 공적에 걸맞은 재평가와 함께 선생의 삶과 정신을 후세에 제대로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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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목

대구경북 대학과 보훈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기사를 작성하는데 집중하고 한번쯤 생각날수 있는 기사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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