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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논픽션 龜尾史 .12] 박희광, 온몸을 던져 구국의 꽃이 되다

2012-09-12

만주를 누빈 ‘항일 암살요원’… 김구 선생 죽음으로 공로 묻힐 뻔

20120912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도립공원 입구에 있는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의 동상. 1984년 처음 세워졌다가 심하게 부식되고 훼손된 것을 2011년 11월, 27년 만에 새롭게 단장했다. 사진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Story Me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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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박희광 의사. <박정용씨 제공>

구미 선산 출신의 박희광 의사(1901~70)는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손꼽힌다. 어릴 때부터 애국심이 남달라 16세의 어린 나이에 임시정부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는 이곳에서 친일세력을 비밀리에 암살하는 특공대원 임무를 맡았다. 여순고등계 첩자로 악명 높았던 정갑주를 비롯해 친일세력이었던 보민회장 최정규 등이 박희광 의사에 의해 숙청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 배정자를 중국 다롄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1924년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던 중 붙잡혀 1심에서 사형을, 2심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20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광복 후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겸허하게 살던 중, 지인들의 권유와 노력으로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논픽션 구미史’ 12편은 독립운동가 박희광에 대한 이야기다. 현재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그의 구미 생가 복원과 추모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최근에는 그의 둘째아들 정용씨가 ‘박희광 의사, 조선독립 대한통의부의 특공대원으로서의 투쟁활동’이라는 논문을 통해 선친의 항일투쟁사를 재조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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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 의사의 독립운동 활동을 다룬 1924년 7월26일자 독립신문. 친일파였던 정갑주, 최정규 등을 암살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된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왼쪽 사진이 ‘박상만’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박희광 의사. <박정용씨 제공>
#1. 일제 첩자 암살 지령을 받다

1924년 6월1일, 여순의 밤은 캄캄했다. 박희광과 김광추, 김병현은 조심스럽게 밤길을 걸어 한 집 앞 골목에 몸을 숨겼다. 그들을 안내한 윤영기가 그 집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가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대문에 사형선고문을 붙였다.

“윤 동지는 밖에서 망을 보세요.”

윤영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재빨리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가족과 환담 중이었다. 박희광이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주인에게 권총을 겨누었다.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말을 마치자 바로 주인을 쏘았다. 그 가족들도 모두 죽였다. 그리고는 재빨리 밖으로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튿날 여순 시내는 발칵 뒤집혔다.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다.

여순조선인회 서기로 있으면서 여순 고등계의 첩자로 악명이 높았던 정갑주의 최후였다. 박희광과 김광추·김병현은 일본 앞잡이를 처단하는 3인조 암살단인 셈이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인 집단촌과 독립단체를 와해시키기 위해 재만조선인회(在滿朝鮮人會)를 조직하고 그 산하에 보민단(保民團)·일민단(日民團) 같은 친일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들에 관여한 친일 주구들은 무고한 양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밀고와 살상을 감행하여 그 피해가 컸다. 이에 따라 독립단체들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박희광은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 제5중대에 소속돼, 중대장 김명봉의 명령으로 김광추, 김병현과 더불어 친일 밀정을 암살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 첫 거사를 정갑주를 죽이는 일로 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여순을 나왔다. 다음 지목된 최정규를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최정규는 매국단체인 일진회 회원으로 회장 이용구와 더불어 한·일병합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만주에 건너와 재만조선인회와 보민단을 조직하고, 각처에 연락망을 두어 밀정으로서의 그 만행이 지독했다.

최정규의 집은 봉천에 있었다. 정갑주를 살해한 뒤 일주일 뒤에 그들은 최정규의 집을 확인, 거사를 치를 밤을 기다렸다.

그의 집은 2층이었다. 한밤 중 그들은 역시 사형 선고문을 대문에 붙였다.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하겠소. 두 사람은 밖에서 망을 보시오.”

김광추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시오, 김동지.”

김광추가 집안으로 들어갔다. 곧 이어서 안에서 5~6발의 총성이 들렸다. 최정규와 장모와 처, 그리고 비서까지 사살한 것이다. 세 사람은 신속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 현장에서 벗어났다. 이때 최정규는 2층 책상 밑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유지했다는 후문도 있다.

박희광은 박상만(朴相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경주부윤 박수홍(朴守弘)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박윤하(朴胤夏)이다. 구미시 봉곡동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부윤까지 오른 박수홍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동네다. 남달리 울음이 크고 눈이 똘망똘망하고 발이 상당히 커서 어머니가 “이놈이 장차 자라서 나라에 뭔가 일할 일꾼이 되겠구나”라고 말하곤 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되자 8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갔다. 가족 전부가 만주로 간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들 박희광의 독립운동 행적과 관련지어서 박윤하 역시 의병운동과 관련된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박윤하의 처가가 의병운동의 사상적 거점인 안동에 있었고, 일제가 작성한 ‘독립운동자금모집사건’에 대한 첩보자료에서 박윤하라는 이름이 김동삼과 함께 나타나는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 만주는 국외로 망명한 독립투사들의 활동무대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10여 갈래의 독립단체들이 활약, 국경지대의 주재소와 헌병 분소 등을 습격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 활기에 차 있었다. 박희광이 16세 때 봉천성(奉天省) 남성자학교(南省子學校)를 졸업하고 오동진(吳東鎭) 휘하 통의부(統義府)에 자진 입대, 6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은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조국을 위한 투쟁의 일선에 나서겠다는 각오가 작용했으리라. 어느 정도의 틀이 잡히자 그는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18세의 나이로 만철연선(滿鐵沿線)과 한만 국경 지대에 잠복하여 중국, 만주, 러시아 등지의 10여개의 군사단체가 벌인 관동군(關東軍)의 진로를 봉쇄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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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 의사의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기록이 게재된 1924년 9월1일자 동아일보. 박희광 의사의 독립운동 활동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이 자료를 증거자료로 1968년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박정용씨 제공>
#2. 오직 조국 위한 일념으로 투신했을 뿐

일제의 악질 앞잡이로 지목됐던 두 사람의 살해 거사가 성공리에 끝나 그들은 퍽 고무된 상태로 계속해서 요인 암살에 몰두했다. 그러나 일이 쉬 풀리지는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 배정자(裵貞子)를 다롄(大連)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했다.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암살 역시 실패하였다. 또 1924년 7월22일 상하이 임시정부로부터 지급받은 폭탄을 봉천의 일본영사관에 투척했으나 불발되어 실패했다.

폭탄 투척이 실패한 그날 저녁 고급요정 금정관(金井館)에 침입했다.

“조선독립을 위한 자금이 필요하오. 십시일반으로 거두고 있으니 조국 독립을 위한 헌금으로 기부해주시오.”

그러나 주인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런 여유가 없어요. 다음에 봅시다.”

“무슨 소리요? 이곳은 장사가 잘되고 있지 않소? 일본 고관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으면 조국을 위해 일부라도 내놓는 게 도리가 아니오?”

설득을 했으나 거부를 당하자, 할 수 없이 권총을 뽑아 위협했다. 군자금으로 300원을 탈취했다.

셋은 재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세 사람의 낌새를 챈 일본 경찰이 집 밖에 잠복해 있었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광추가 총을 맞고는 바로 절명했다.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은 그들로부터 증거물로 권총 세 자루, 실탄 160발, 폭탄 한 개, 사형선고문 여러 장을 압수했다. 곧 혹독한 고문이 시작됐다. 대나무 껍질을 얇게 깎아서 엄지손톱 사이로 쑤셔 넣었다.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컸다. 비명이 절로 나왔다. 또한 뻣뻣한 돼지 목털로 두 사람의 귀두를 찔렀다. 그런 고문들이 계속됐다. 기절하면 감방에 넣었다가 다시 불러 고문을 했다. 그래도 그들은 버텼다.

“모든 책임은 우리 세 사람에게 있소. 오직 조국을 위한 일념으로 그 일을 했을 뿐 배후는 없소.”

거사의 공범으로 잡혀온 윤영기와 조선일보 봉천기자 신명구 역시 아무 관련이 없다고 두 사람은 끝까지 잡아뗐다.

박희광은 관동청 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어서 여순고등법원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여순 감옥에 수감됐다. 길고 긴 감옥생활을 그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버티어냈다. 1943년 그의 나이 43세 때, 일본의 유인(裕仁) 일왕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 감형되어 출옥했다. 20년 동안, 그의 청춘을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출옥 후 그는 중국 충칭으로 옮겨간 임시정부로 가려 했다. 다롄에서 동지 이성갑, 유하도와 같이 가려했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움직임이 용의치 않았다. 부득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결혼부터 했다. 44세의 만혼으로 문화류씨(文化柳氏)를 맞은 것이다. 곧 이어서 광복을 맞았다. 그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새 조국을 위해 뭔가 큰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3. 뒤늦게 추진된 기념사업

임시정부 요인들이 속속 귀국했다. 박희광은 죽첨장(竹添莊)으로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다. 김구는 그의 손을 잡고는 한동안 할 말을 잊지 못했다.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돌아가 잠시 기다리라 했다. 며칠 후 비서를 통해 위로금으로 2천원을 주면서 정부 수립 때 다시 보자고 했다. 거금이었다. 당시 집 한 채가 100원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1949년 김구가 암살됐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진 것이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는 갑자기 외로움을 느꼈다.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었다. 너도 나도 애국자로 나서는 때였으나 박희광은 입을 닫았다. 옥중에서 익힌 재봉 기술로 양복 수선을 생업으로 살았다. 생활고가 컸다. 감옥생활과 고문으로 인한 심신의 괴로움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처가가 있는 왜관으로 이주했다. 한때 천주교에 귀의하여 왜관성당에서 시메온이란 세례명으로 영세까지 받았다. 그러나 슬하에 5남매를 두고 처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고통을 또 겪어야 했다.

1967년 초 동아일보사에서 그에 관한 자료를 가까스로 찾아냈다.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 기록이 게재된 1924년 9월1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동아일보 대구지국에서 발견됐다. 행적이 입증된 것이다. 이를 증거자료로 삼아 1968년 3·1절을 기해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다. 정부의 보훈을 받아 노후에 다소 보탬이 되었으나, 1970년 l월22일 71세를 일기로 서울 원호병원에서 타계했다.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자묘원에 안장되었다.

1972년 선산군의 뜻있는 유지들의 발기로 박희광의 기념사업이 추진되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10여년간 진척되지 못했다. 이후 1983년 9월5일 구미문화원에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뒤 구미문화원 사업으로 착수, 1984년 8월15일 기공식을 가지고 12월28일 동상 제막식을 했다. 이후 심하게 부식돼 2011년 11월17일 새단장했다. 동상은 금오산도립공원 안에 있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도움말=구미문화원, 박정용씨의 논문 ‘박희광 의사 조선독립 대한통의부 특공대원으로써의 투쟁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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