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애니메이션은 비즈니스 수단 아닌 꿈·사랑 그 자체”
“제작 도중 日 3·11 지진, 인간적 고뇌 느껴
렌즈가 아닌 눈으로 직접 보고 그림 그려
세계적으로 3D애니 대세지만 난 관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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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개봉을 앞둔 ‘바람이 분다’는 1920년대 비행기 설계가로 이름을 날렸던 실존 인물 호리코시 지로의 꿈과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그동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등 비행에 대한 동경을 작품 속에 담아 왔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때로는 리얼하고 환상적으로, 때로는 만화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론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를 이 영화에 고스란히 반영했다. 그래서일까. ‘바람이 분다’는 하늘, 사랑, 꿈,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비행의 설렘으로 가득하다.
“애니메이션은 아름다운 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애니메이션은 꿈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수단이 되고 있다. 상업적인 목적만 가지고 만들어진 상당수의 애니메이션은 가치가 없다. 사라져도 좋다.”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초심(꿈)을 잃지 않고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그의 첫 일성은 모든 걸 돈으로만 환산하려는 현 세태(애니메이션계 포함)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지난달 26일 일본 도쿄도 고가네이시에 있는 니바라키 아틀리에에서 한국기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가 외국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바람이 분다’로 5년 만에 대중에게 돌아온 그는 한국 취재진을 상대로 소신 있게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 50년 넘게 애니메이션에 종사해 왔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꿈에 대한 생각은 물론, 민감한 정치적 부분까지 포함한 돌직구성 발언이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실존 인물을 다뤘다.
“‘바람이 분다’는 1903년에 태어난 호리코시 지로라고 하는 실제 비행기 설계사와 호리 다츠오라고 하는 1904년에 태어난 소설가이자 시인인 두 인물을 섞어 놓은 영화다. 호리코시 지로는 당시 전쟁참여 요구를 많이 받았지만, 이에 대항하면서 꿈을 이뤄 온 사람이다. 그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무조건 죄를 안고 가야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의 아버지도 전쟁에 가담했지만 좋은 아버지였다. 전쟁으로 힘든 시기를 살았던 만큼, 그들은 그들만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시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그들이 시대의 그림자를 업고 가는 건 숙명이지만, 무조건 그들을 나쁘게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관동 대지진이 영화의 주요배경으로 등장한다. 2011년 3·11 대지진을 겪은 일본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의도였나.
“관동대지진은 일본의 운명을 정하는 데 있어서 큰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전의 일본은 아주 안정적인 사회였지만, 지진 이후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나서 일본인들은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지진 신 콘티를 그리고 난 이후에 일본에서 3·11 지진이 일어났다. 점점 재해가 커진다고 느꼈을 때, ‘이 작품을 계속 만들어야 할까’라는 고민도 했고 몇몇 스태프는 더는 작업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작업을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지금도 그것은 옳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사회상은 지금의 일본 분위기와 상당히 비슷하다. 당신은 지금 일본의 분위기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들었을 때 일본의 상황은 버블경제가 피크였다. 따라서 그것은 ‘이 사회가 어찌 되어 갈까’라는 의문과 걱정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후 ‘벼랑 위의 포뇨’를 만들고 나서 진짜 지진이 왔고, ‘바람이 분다’라는 작품을 만들면서는 3·11 지진이 왔다. 이런 것을 보면 내가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혹은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일본의 상황이라면 ‘모노노케 히메’ 같은 작품이 어울릴 것 같다.”
-당신은 30대 초반에 세계의 비밀이 뭔지 알 것 같았고, 그 순간 창조의 시간은 끝났다고 말했는데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머리카락의 경우 그냥 머리에 붙어 있는 게 아니라 긴장을 하면 쭈뼛쭈뼛 서듯 미묘하게 변화한다. 그런 변화를 발견했을 때나 사람들의 움직임을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세계가 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관건은 근육이다. 애니메이션에서 움직임을 그리는 것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지만 근육의 변화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특히 애니메이션은 그걸 만든 사람이 어떤 렌즈를 선택해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선명한 렌즈로 보게 되면 인간의 능력 이상으로 본 것을 표현하게 된다. 동시에 육안으로 본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렌즈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경과 눈으로 직접 보고 기억한 다음에 그림을 그려야 좀 더 크게 그릴 수 있다. 게다가 나는 애니메이션에 종사한 지 50년이 되었기 때문에 나의 창조적 시간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다.”
-극 중 등장하는 ‘제로센’이라는 비행기가 가미카제 특공대에 쓰인 비행기라고 알고 있다. 한국에도 가미카제에 의해 희생당한 사례가 있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민감한 소재다.
“지금까지 내 작품에 이렇게 많은 일장기를 그려본 적이 없다. 영화 속에서 일장기가 붙은 비행기들이 줄줄이 떨어진다. 이 장면들을 통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제로센에 대해서 말하자면, 실제로 가미카제 특공대에 사용된 제로센은 구식이었기 때문에 당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주인공 지로는 실제로 많은 압박을 받았지만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인물이었다. 단지, 전쟁이 끝나고도 그 회사에 계속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박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무조건 죄를 안고 살아야 되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아날로그 감성을 유지하기 위해 영화 속 효과음을 사람이 직접 했고, 이례적으로 모노사운드를 채택했는데.
“지브리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기술 혁신이 증진되고 있다. 영상뿐만 아니라 소리 효과에서도 기술이 정밀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림이나 소리 등이 더욱 좋아진 반면, 잃은 것도 분명 있다. 개인적으로는 정밀하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의 사운드를 인간의 소리로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리 전문가인 가지마제에게 의뢰했다.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한다.”
-헌법 개정에 대한 당신의 최근 발언(지브리가 발행하는 소책자 ‘열풍’에 헌법 개정 등 우경화 움직임을 보이는 아베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이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내가 평소 생각한 것을 솔직히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 생각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다. 내 나라의 정부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게 좀 껄끄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한 일을 감싸줄 순 없는 일이다. 지금 시대가 크게 움직이고 있다. 더 어려워질 수도,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 이를 경고한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당신의 역사 인식과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도 듣고 싶다.
“1989년 버블경제가 붕괴되고 같은 시기에 소련도 붕괴됐다. 그리고 그 시기에 일본인들은 역사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일본이기 때문에 현재 무라야마 담화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 무엇보다 역사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그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는 예전에 일본이 청산을 했어야 했다. 하시모토의 발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또다시 오르내리는 것은 굴욕이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사죄해야 한다. 일본 정부가 일본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은 거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이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은 3D가 대세다. 그러나 지브리 스튜디오는 셀 애니메이션을 고수하고 있다. 혹시라도 3D 애니메이션을 만들 계획은 없나.
“전혀 없다.”
-일본에서 ‘바람이 분다’가 상당한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관객이 와줄지 모르고 흥행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그보다는 관객들이 순수한 사랑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그런 감성을 한국 관객들도 함께 공감하고 소통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여러분의 힘이 필요하다.”
도쿄=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대원미디어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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