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성장통은 아픔 아닌 환희…그걸 70년대 대구 얘기로 그리고 싶었다”
중학시절 미술반서 겪은
정신적 변화 작품 모티브
기쁨·고독·절망 등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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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엄창석이 지난달 31일 독자와 함께 소설 속 무대가 된 곳을 타임여행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
“‘데미안’이나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대표적인 성장소설이 우리나라에도 한 권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빨간 염소들의 거리’가 그런 고전을 뛰어넘을 수야 없겠지만.”
청소년기의 방황과 좌절, 꿈과 희망을 그린 소설이 한 권 나왔다. 청소년과 청소년을 가진 부모가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란 생각도 든다. 그것도 대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야기라 더 큰 호기심과 애착이 간다. ‘빨간 염소들의 거리’는 스마트폰에 중독된 아이에게 선물할 좋은 책이다. 단, 작가의 말대로 ‘책읽기’를 강요해선 안 될 터이다.
소설가 엄창석은 대구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손에 꼽을 전업 작가다. 소설가 대부분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는 17년 전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인 대구로 왔다. 그는 중학교 시절 자신이 미술반에 들어가고 나서 엄청난 정신적 변화를 겪게 된 것을 모티프로 ‘빨간 염소들의 거리’를 썼다. 일종의 자전적 소설인 셈이다.
“우리나라엔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이나 김주영의 ‘홍어’를 비롯해 은희경의 ‘새의 선물’처럼 주인공이 열두 살 이전의 소설은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청소년기라고 하는 10대 중후반을 그린 소설은 별로 없어요. 물론 20대 이후의 소설은 많지만요. 전 청소년기 문학을 하이틴로맨스로 치부할 게 아니라 본격문학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습니다. 10대 중반에서 20대까지는 황금비율의 시대입니다. 어린이 때처럼 ‘저게 무엇이냐’고 어른에게 묻는 시기가 아니라 ‘국가는 왜 필요한가’ ‘경찰은 왜 있어야 하나’ ‘학교는 왜 가는가’와 같이 자신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는 시기입니다. 한 방향으로만 가지 않는 그 시기에 어떤 기억은 물처럼 그냥 흘러갈 수도 있지만, 빵처럼 크게 부풀어 오를 수도 있지요. 예컨대 세월호 참사 때 어떤 이에겐 그 슬픔이 상상 이상의 아픔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청소년기에 대해 “세계의 중심에 맞닿아 있는 아름다운 시기”라며 “성장통(痛) 역시 아픔이 아닌 신성한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성장통을 ‘성장의 환희’로 바꿔 표현하는 게 낫다고도 했다. 또 흔히 쓰는 ‘중2병’이란 은어도 단지 어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용어일 뿐 ‘병’으로 표현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청소년에게 최고의 상담전문가가 바로 그란 생각도 든다.
엄창석은 “소설이 70년대 중후반의 이야기이지만 단지 추억의 형식으로만 회고하고 복원하고 싶지 않았다”며 “문학은 과거의 이야기를 해도 현재와 현실의 상황과 연결돼야 가치를 발한다”고 했다.
그는 소설 제목에서 ‘빨간’은 사춘기의 젊은 생기를 상징하고 ‘염소’는 가축이지만 제도권 속에 있는 아이들을 의미한다고 밝히며 10대 중반의 기쁨과 희열, 고독과 절망을 이야기로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이 책을 쓰는 데 꼬박 4년이 걸렸습니다. 1년간 쓰고 3년간 퇴고를 했지요. 민음사 장은수 대표와 상의해 D시를 ‘대구시’로 J중학교를 ‘중앙중’으로 고치기도 했습니다.”
엄 작가는 내년 초쯤 소설집을 한 권 내고, 제대로 된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몰두할 예정이다. 그는 “5만부 정도라도 팔렸으면 좋겠다”고 겸손해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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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창석은
1961년 영덕에서 태어나 영남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화살과 구도’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집 ‘슬픈 열대’ ‘황금색 발톱’ ‘비늘 천장’과 장편소설 ‘태를 기른 형제들’ ‘어린 연금술사’ ‘유혹의 형식’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개츠비의 꿈’을 출간했다.
중학시절 미술반서 겪은
정신적 변화 작품 모티브
기쁨·고독·절망 등 담아
소설 쓰는 데 꼬박 4년
청소년들 많이 읽었으면
타임머신 타고 옛 대구의 골목길로 간 듯…동인문학상 최종심 후보작 올라
●‘빨간 염소들의 거리’는
이 책은 1970년대 대구를 배경으로 중학생들의 성장기를 그린 소설(민음사)이다. 지난 5월초에 발간돼 동인문학상 최종심 후보작에 뽑혀 10월 열릴 최종심에 올랐다.
소설 속에는 중앙중학교, 범어천, 신암육교, 송라시장, 수협공판장, 73·74아파트 등 익숙한 대구의 고유지명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러한 곳들을 세밀하게 묘사해 친근감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범어천에 대해 ‘학교(중앙중) 담장을 따라 범어천이 콘크리트 옹벽 사이로 흘렀다. 수성못에서 출발하여 도로 밑으로 흘러온 이 도시 개천은 우리 학교 옆을 지날 때 잠깐 태양을 보는데 이곳이 하류여서 몇 미터 못 가 은강천(신천)으로 합류하고 만다. 범어천은 뒷골목 상가에서 버리는 온갖 음식물 찌꺼기가 검붉게 발효되어 수면에 둥둥 떠다녔다’고 썼다.
아침에 책을 집어들어 저녁까지 단숨에 읽어버렸다는 이하석 시인은 이 소설에 대해 “성장소설 형태를 취하면서도 주제는 여전히 존재의 성찰이라는 삶의 근원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단순한 성장소설이라기보다 젊은 눈으로 본 세계에 대한 보고서이자, 새롭게 대면하는 세계에 대한 놀라움이 그려진 소설”이라고 평했다.
허정애 경북대 영문과 교수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나 모비딕의 이스마엘이 자연을 탐구하고 자연으로 향했다면 이 책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연상시킨다. 주인공 한형주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란 무엇인가 하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탐미적 소년”이라고 했다. 이어 허 교수는 “소설이 영화로 나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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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구 위클리포유 대구지오 자문위원(시간과 공간 이사)은 “지금까지 대구를 무대로 쓴 대표적인 소설은 이동하의 ‘장난감 도시’(1982),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1988) 정도였다. 둘 다 전후복구기 성장소설이지만 이 책은 1970년대 중·고교 시절을 배경으로 한 것이 다른 점”이라면서 “이동하와 김원일의 소설 주인공 길남이와 윤이는 각각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소년으로 머물고 싶어도 머물 수 없었던 ‘내몰린 소년들’이었지만 이 책 속의 한형주는 자신만의 탐미적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과 어른들의 세계로 편입되기를 거부했던 ‘탈주적 소년’”이라고 비교했다.
권 위원은 대구문화 6월호에 1976년 항공사진을 빌려 주인공 한형주가 다녔던 학교 가는 길(1974~76)을 꼼꼼하게 그려 눈길을 끌었다.
지난달 31일 오후 대구 교보문고에서 소설가 엄창석의 ‘빨간 염소들의 거리’ 출간기념회가 열렸다. 행사에는 중·고교 학생을 비롯해 많은 시민이 자리를 메웠다. 행사 후 민음사 주최로 소설의 무대가 된 중앙중~신천동~송라시장~신암동까지 기억여행을 떠났다. 행사에는 엄창석이 지도하는 문학교실 ‘작은 이야기마을’의 작가와 작가지망생 20여명을 비롯해 40여명이 동참했다. 지금까지 출판기념회는 흔했지만 작가와 함께 소설 속 무대가 된 골목을 걸으며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행사는 처음이었다. 엄 작가는 소형 마이크를 든 채 자신이 경험했던 추억을 더듬으며 당시 사람과 공간에 대한 느낌과 소회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다녔던 중앙중학교 주변은 며칠 전까지도 그대로 있었는데 현재 공사가 진행돼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당황하기도 했다.
골목투어를 기획한 민음사 장은수 대표도 소설 속의 배경이 된 현장을 걸으며 1970년대 중반으로 돌아갔다.
장 대표는 “공간적 기억으로 대구라는 도시를 살려내고 싶어 골목투어를 기획하게 됐다”며 “비록 짧은 길이지만 문학으로 인해 길이 되살아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엄 작가에게 소설 속 지명을 가공이 아닌 실제지명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하기도 했다. 장 대표는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100년 뒤에도 조금의 변화는 있겠지만 그대로 존재할 것”이라며 “외국 같은 경우 유명한 소설의 무대가 된 거리가 바로 유명한 관광지가 된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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