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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경북 이야기를 찾아 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3] 봉화 청량산과 퇴계 이황

2015-01-28

“청량산을 가보지 않곤 선비노릇 못한다” 오산당(퇴계가 학문 정진하던 곳)서 수도하며 성리학 집대성

[경북 이야기를 찾아 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3] 봉화 청량산과 퇴계 이황
퇴계가 성리학을 집대성했던 장소 청량산 오산당은 그의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로 남아 대유학자의 흔적을 기리고 있다. <영남일보 DB>

1982년 경북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청량산(淸凉山·해발 870m)은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경북북부권의 유명 관광지다. 청량산은 2007년 명승 23호로 지정됐다.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와 안동시 도산면, 예안면을 끼고 있다. 청량산은 청량사(淸凉寺)에서 따온 이름으로 맑을 ‘청(淸)’과 서늘할 ‘량(凉)’자를 쓴다. 고려시대까지 ‘수산’으로 불렸으나 조선시대부터 청량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청량산의 이름은 늘 선비와 군자에 비유되곤 하는데, 항상 깨끗하고 향기로운 마음을 지녀 ‘책 읽듯이 산에서 노닐어야 한다’는 조선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70)의 심성이 오롯이 담긴 산이다.

산의 모양새는 마치 12장의 연꽃잎이 한 장씩 모인 것처럼 보인다.


“심신 수양·책 읽기 좋은 名山”
선비의 마음 녹인 수려한 풍광
산 즐겨 오르내리며 군자의 길

“청량산서 학문 나누고 싶어”
수많은 제자에게도 뜻 전해



풍기군수 주세붕은 청량산 12봉을 ‘육육봉(六六峯)’이라 이름붙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송나라 주희가 ‘무이구곡’에서 성리학적 이상향을 표현한 무이산을 보고 영감을 얻은 듯하다. 연꽃술에 해당하는 장소에 청량사가 위치해 있으며, 퇴계가 학문을 정진하던 오산당은 그의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경북문화재자료 제244호)로 남아 있다.

속세와 단절된 듯한 청량산의 수려한 풍광은 유학자들에게 자신의 이상향을 실현할 공간으로 비쳤다. 이 때문에 많은 선비가 청량산에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청량산도립공원에 첫발을 내디디면 퇴계선생시비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각의 관모를 쓴 듯한 시비에는 시 한 수가 적혀있다. 퇴계는 일찍이 안동부사를 지낸 숙부 송재공 이우 밑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 장소 중 한 곳이 청량산의 오산당이었다. 이런 이유로 청량산과 퇴계의 깊은 인연은 후세에도 기억하며 이어져오고 있다. 이 시를 찬찬히 읽어보면 산을 오르며 퇴계가 느꼈을 법한 감정의 변화와 학문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글읽기가 산을 유람함과 같다

사람들 말하길 글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지만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읽기와 같구나

공력을 다했을 땐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깊고 얕음 아는 것 모두 저로부터 말미암네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 보며 묘리를 알게 되고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중략)



[경북 이야기를 찾아 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3] 봉화 청량산과 퇴계 이황
청량사에서 내려다본 청량산 가을 전경.

대유학자가 머물렀던 산답게 청량산은 여러 역사적 인물과도 인연이 깊다. 먼저 퇴계의 경우 청량산에서 학문을 닦아 군자의 길에 다가서려 했으며, 스스로 청량산을 즐겨 오르내렸다. 또한 청량산의 청량사는 신라시대 고승으로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화엄종을 창시한 의상대사와도 인연이 있다고 한다.

신라 말 천재문장가 최치원(崔致遠) 또한 청량산에 은거했다. 그의 이름을 딴 ‘치원암’ ‘최치원봉’ 등 여러 유적이 남아있다.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도 청량산에서 글씨 연습을 했으며, 그가 글씨를 연마한 굴은 ‘김생굴’로 불린다. 고려시대에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봉화로 피신한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청량산에서 머무른 바 있다. 청량사 유리보전의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퇴계는 청량산 오산당에서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했다. 퇴계가 오산당에 머물 때는 웬만하면 청량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퇴계가 청량산의 매력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다.

퇴계의 청량산 사랑을 증명하는 일화는 지금도 전해내려온다. 퇴계는 “청량산을 가보지 않고서는 선비 노릇을 할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또한 “비록 지금은 다른 고을에 있으나 이 산은 실지로 내 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봇짐을 메고 삼촌과 형을 따라 이 산에 오르내리며 독서하였던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라며 청량산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퇴계는 청량산에 대해 ‘심신수양은 물론 책읽기에 좋은 명산’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퇴계는 안동의 집에서도 늘 청량산을 그리워했다. 어느날 안동에 살고 있던 퇴계의 이웃집 노인이 물었다. “그대는 청량산이 그렇게 마음에 든다면 청량산에 머물 일이지 왜 도산에 머무는가.” 노인이 질문을 던지자 퇴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청량산에 유거하는 일은 소원이기는 하나 여기 도산이 좋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청량산이 더 좋습니다.”

퇴계가 학문에 집중할 수 있었던 원천이 청량산이었다는 말이 언뜻 이해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퇴계는 청량산과 떨어져 지낼 때에도 수많은 제자들에게 청량산에서 학문을 나누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퇴계는 안동 도산에서 청량산에 이르는 오솔길 ‘녀던길’을 즐겨다녔다. 퇴계는 시를 읊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녀던길을 통해 청량산으로 향했을 것이다.

퇴계가 학문을 정진하던 청량산은 현재 많은 관광객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유명 관광지다. 특히 2008년 설치한 청량산 자란봉에서 선학봉으로 이어지는 ‘하늘다리’는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하늘다리는 해발 800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길이 90m, 높이 70m다. 봉화군홈페이지에 따르면 산중에 설치된 현수교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앞으로 청량산을 오른다면 성리학의 꽃을 피운 대유학자 퇴계의 발자취를 마음에 담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청량산 육육봉의 아름다움을 만끽한 후 청량사 유리보전 약사여래불에 소원 한 가지쯤 빌어보는 것도 손해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

글·사진=박순화 <경북 스토리 기자단> vivianna1952@hanmail.net
공동기획: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 경상북도 문화콘텐츠진흥원, 경상북도,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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