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부산안면옥’ 방수영 대표
평양에서 온 남자의 6·25 기억 그리고 삶
냉면집 열고 외할머니 경영 노하우 실천해 성공
6·25전쟁 65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방수영 부산안면옥 대표가 식당 앞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과 6·25전쟁을 겪은 그는 스무 살 때 월남해 대구에서 자수성가했다. |
성성한 백발에 평양 사투리. 85세라고 보기 힘들 만큼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그는 대뜸 기자에게 영화 ‘국제시장’을 봤느냐고 물었다.
“그걸 보고 안 울었던 사람이 없다고 해. 6·25전쟁 때 함경도에 살던 사람은 그래도 수송선을 타고 곧장 부산으로 왔지. 기런데 평안도 사람은 목숨을 걸고 끊어진 대동강철교를 타고 왔더랬어. 다리 밑 대동강에 빠져 죽은 사람도 있었어. 개성을 거쳐 서울로, 다시 대전에서 부산으로 생사를 넘나들며 죽을 고생을 했지. 그 해 겨울이 아직도 생생해.”
방수영‘부산안면옥(대구시 중구 국채보상로 125길 4)’ 대표(85)는 지난 23일, 식당 안에서 손님을 맞으며 일일이 자리를 안내했다. 메르스 여파로 대부분의 식당이 된서리를 맞은 가운데도 부산안면옥은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다. 12시30분이 되자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나랑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 늙은이한테 무슨 이야기가 있다고. 허허, 참.”
방 대표는 월남 1세대다. 평양시내 중심인 수옥리에서 2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하지만 조실부모한 탓에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외가에서 줄곧 자랐어요. 외할아버지 이름은 안진형인데 이분이 구한말에 일본주재 대한제국 대사관에서 근무했다고 하더라고. 기런데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되면서부터는 일절 일본말을 하지 않았더랬어. 일본과 절연을 한 게지. 식민지 백성으로 산다는 게 수치스러웠을 것이야. 외할아버지는 집안에 칩거하다시피 했어요. 고저 서예만 하고 기랬는데 글씨를 참 잘 쓰셨어. 서예 한 점 없는 게 아쉬워. 전쟁통에 기게 어디 쓸모 있었겠나.”
방대표가 잠시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외할아버지 대신 외할머니가 집안의 생계를 잇기 위해 평양 시내에서 냉면집을 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26년 9월11일에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를 보여줬다. 신문에는 ‘평양에는 40여 곳의 제면소가 있다. 면은 특히 평양의 명물인바 부민의 식료 중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평양냉면은 사시사철 먹는 음식이다. 연매출액도 상당하니 실로 50만원에 달한다. 대규모로 경영하는 면옥은 ‘중앙면옥’ ‘안면옥’ ‘제일면옥’ ‘임면옥’ ‘기성면옥’이다’라고 보도됐다.
“안면옥의 안은 안씨(安氏) 성을 의미해요. 기래서 성을 따라 외할머니가 ‘안면옥’으로 했지. 외할머니는 성격이 남자 같았어요. 경영 수완도 좋고 직원들도 잘 다뤘지. 평양 중심지에 안면옥 말고도 냉면집이 더러 있었는데, 평양에 있던 양말공장, 내복공장보다 매출액이 높았다고 해요. 식당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엔 안면옥에서 운영하는 제분소가 따로 있을 정도였지. 내 기억으로는 양철 지붕으로 된 3층 건물인데 3층에선 원재료인 메밀을 쌓아놓았고, 2층으로 관을 연결해 빻았어. 맨 아래층에 둘레가 약 2m 되는 맷돌이 여러 개 있었는데 빻은 메밀을 맷돌로 갈아 면을 뽑았다고.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밤 12시까지 영업을 했던 것 같아. 야식으로 배달을 시킬 정도였으니 참 대단했어. 안면옥이 지금 평양냉면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지.”
방대표에 따르면 외할머니는 1년에 한 번 직원잔치 겸 굿을 했다고 한다. 20여 명 되는 직원을 모아 빈대떡과 고기를 대접하고, 도박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돈을 잃은 직원에겐 돈을 보태주었단다. 직원의 노고를 격려하고 가족처럼 대하니 일생을 안면옥과 함께한 직원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할머니가 직접 음식의 간도 보고 면을 씻었다고 했다. 방 대표가 46년째 부산안면옥을 운영하면서 외할머니의 식당경영 노하우를 따랐음은 물론이다. W2면에 계속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